9. 해병대와 나

 

    1959년 <사라호> 태풍이 휩쓸고 간 진해 경화동 해병신병훈련소 병영에는 바닷가에 긴급하게 축조한 교실 같은 2층 막사 두 동과 연병장 옆에는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 엎어놓은 것 같은<콘셋트>막사가 즐비하게 늘려있었다.

  <콘셋트>라 불렸던 이동식 조립병사는 파장곡선으로 접어진 철판을 반원으로 휘어 엎은 형상의 막사를 말한다. 미군들은 6. 25사변 때 조립식 병영을 신속하게 만들어 사용하는 기동성을 갖추고 있었는데, 오늘날의 미국이 국제경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최강국이 된 기동성의 하나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찰이 나를 주동자로 지목하여 수배하고 있다는 소문에 괜히 불안하여 얼마동안 횡천, 남해, 부산, 등 누님 집을 돌아 다녔다. 이유는 친구 진용주가 근방지다는 이유로 구타를 당했다고 하소연 하는 바람에 친구들과 작당하여 신기로 가서 주먹이 세다는 그 선배를 상대로 싸움을 걸었는데 그가 고소를 하였던 것이다. 생계가 어려운 집에서 노부모님을 도와 드리지도 못하고 오히려 걱정만 끼치는 것 같아 어디를 가든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형님도 군에 입영할 날자가 남아 있었는데 신분증이 없다는 이유로 기피자처럼 강제징집하는 <길거리 훌치기>에 걸려 해병대로 편입하게 되었고 힘든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해병대사령부인사국에서 복무하고 있다는 군사우편을 받은 뒤였다. 형님의 군번은 9260807로 신병68기로 나보다 30기선배가 된다. 나는 형님이 제대 할 때까지 내가 군 입대를 연기하고 노부모님을 모시고 있으라고 하는 편지도 몇 번 받았었다.

  그런데 당시나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경찰에 고소만 하면 경찰은 무고든 아니든 앞뒤 가리지 않고 만만한 상대나 순박한 사람들은 무조건 잡아다 경찰구치소에 가두어 구류를 살렸다. 연줄이 있거나, 잘 아는 경찰관이라도 있어야 뇌물을 주고 풀려날 수가 있었으니, 경찰서에 잡혀가기만 하면 무조건 모두가 죄인이 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버렸다.

  부모님과 잘 지내는 어떤 친지가 계셨다. 재력도 있었고 경찰관서나 여타 관청과 평소에 친분이 많다고 우쭐거리며 멋을 부리던 그분이 어느 날 무고에 걸려, 돈은 돈대로 뜯기고, 누명을 벗지도 못한 채 상당기간 구류를 살고 나온 뒤부터 아는 놈들이 도둑이었다고 한을 남기며, 죽을 때까지 순사하고 사돈을 맺는다면 인사불성이라고 어머님에게 하소연 하는 모습을 본일도 있었다.

  그분의 말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나의 넷째자형이 횡천면 월평리의 순박한 농군이었는데 우리 집에 하숙을 했던 한 경찰관이 처가에 다니러 온 자형과 누님을 보고 무슨 샘이 났었는지 어떤 사람이 보도연맹에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며 확인만 하고 오면 된다고 하면서 함께 경찰서로 간 후 영원히 돌아오시지 않았다. 그 경찰은 그날 바로 함께 나왔다고 말을 했지만 아직도 소식이 없다.

  미국인들의 속담에 <새빨간 거짓말>을 <Tell it to the marine!;해병대에 물어봐라>라고 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경찰을 믿지 마라!(Tell it to the police!)>라고 했던 기억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전란의 포화 속에서 자형의 시체라도 찾아내겠다며 산야를 정신없이 헤매던 고운 모습의 누님이 어린 나에게도 그토록 가련하고 불쌍해 보였다. 그 누님은 지금 한국경찰관의 한을 고향에 묻어둔 채 유복자인 딸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하신 후 막내인 내 환갑 때 왔다 가셨다.

  그래서 죄 없고 힘이 없는 사람일수록 경찰을 피하여 무고혐의가 벗겨져 여론이 경찰이 찾지 않도록 될 때까지 우선 피하는 것을 상책으로 여겼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심지어 배경이 있거나 실력이 있는 사람의 범죄행위를 현행범으로 고발하여 손에 잡혀주는 것을 제일 무서워했던 경찰이나 형사가 참 많았다.

  형님과 동기동창인 도문홍 선배는 나의 억울함을 보다 못해 자기가 경비를 들여가며 나를 해병대에 입대시켜 주었다. 이제야 그때의 고마움에 감사를 드리는 것 같아 송구스럽다.

  그 당시만 해도 징집기피자가 많은 사회라, 피의자로 경찰수배를 받을 때면 군에 지원하면 수배사건을 군으로 이첩 통보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신병신원조회 때 하잘 것 없는 누명이거나 경범이라 거의 95%가 군부대 직속사령관의 훈방조치로 거의 면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인강도 같은 중죄인은 군에서도 경찰로 재 이송되었고, 요행으로 빠지면 제대 후에 바로 입건이 되는 일도 있었다.

  신병훈련소에 가입대하고 아직 두발도 깎기 전날 밤부터 나의 인생은 시련의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직 입대식도 하지 않았는데 입대 리허설을 한다며 향도와 전령 분대장과 소대 서무사란 이름을 나열하며 선출인지 지명인지 알 수없는 인선을 한다. 한 소대에 두 하사관이 있는데 하나는 소대장의 직분이고 하나는 교관의 직분이다. 다른 중대의 중대장은 모두 대위였는데 우리의 중대장만 중위였다. 사람이 후덕하고 순하게 생겨 해병대장교 같지 않았다. 내가 훈련을 마칠 즈음 대위로 진급 하였다. 나의 소대는 5중대 5소대 군번은9279360, 제92기10차(해병98기)였다.

  키가 크고 인물이 잘생긴 인천짠물이란 별명을 가진 친구가 행도로 선임되고 덩치가 크고 주먹깨나 쓰는 광주 친구(이구용; 내 아명과 같아 지금도 그 이름을 기억한다)가 서무사가 되어 가 입대 한 달 동안 매 주말이면 돈을 거두어 소대장과 교관에게 외출비를 상납했고 이것이 불문율이 있었다. 혹독한 기합을 면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신병간부를 뽑은 첫날밤부터 향도와 서무사가 설치며 돈을 거두기 시작한다.

  도문홍 선배는 어머니와 누님들이 여비로 쥐어준 돈을 한 푼도 쓰지 말고 잘 간직하고 있다가 훈련소에 들어가서 비상금으로 해야 훈련을 무사히 마칠 수 있다고 하시며, 신병모집최종합격자가 발표되고 입소할 때까지 일주일이 넘는 동안 두 사람의 체류경비를 부담하시면서도 내가 가진 돈은 한 푼도 쓰지 못하게 하셨다. 도문홍선배가 나를 친동생처럼 돌보며 그렇게 까다로운 해병대 신병훈련소에 백방으로 노력하여 기어이 입소시켜주시고 잘 참고 견뎌내야 면죄가 된다고 당부하셨다.

  나는 잘못을 반성하고 선배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어떠한 어려움도 견딜 각오를 다짐하면서 잘 간직하라는 여비 돈을 한 푼 남기지 않고 털어내어 어머니에게 전해드리라고 하였다. 그러자 선배는 나의 의지를 알았는지 어깨를 만지시며 <네가 참 효자구나!>하시며 <네 몸에 이 돈이 없는 만큼 더 힘들 것이다>그러나 노부모님과 너와 나를 위해서도 참고 견뎌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의 의미를 입소 후 바로 알게 된 것이다.

  나는 한쪽 구석에서 속으로는 걱정을 하면서도 태연하게 거만한척 앉아 있었다. 그래봤댔자 작은 덩치의 나를 우습게보기는 마찬가지인 것처럼 머리를 쓰윽 젖혀 돌리며 나에게 손을 내밀며 수작을 건다.

「어이 너도 내놔!」한다

「누구 말이고?」능청을 부려 보았다.

「어라, 내 팔이 곰배팔이냐?」

 말투마다 자유당 정치깡패들의 언행과 너무도 닮았다.

「너! 어서 왔어?」하고 옆에 있던 향도가 묻는다.

「부산-」

 하동이라고 하면 경찰이 올 것도 같았다. 사실은 부산누님 집에서 입소했기 때문이다.

「너도 내놔!」

「없는 데…」

 무뚝뚝하게 말했다. 실제로 없기 때문에 무섭진 않았다.

「이짜씩이-」

 서무사와 향도가 금방이라도 나를 밟아 버릴 것 같이 기세등등하였다. 그러나 나는 더욱 태연하게 부드러운 말로 조용히 말했다.

「진짜 없다」

 나의 진지하고 겁 없는 말투에 질렸는지

「담에는 애들에게 빌려! 알간?」하며 향도란 놈이 큰소리를 쳤다

 나는 못들은 척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첫날은 용케 봐 주는 듯 했다.

 빌리라는 말의 의미가 <긴바이(훔치는 해병특기)>와 빼앗는 것임을 나중에 알았다. 입대식을 보름정도 앞두고 우리는 장발머리를 모두 삭발을 하게 되었다. 서무사란 놈이 이발소에 인사를 해야 머리를 안 아프게 깎아 준다고 하며 또 돈을 거둔다.

 가만히 처다 보는 나를 보고는 포기 한 듯

「야! 너 혼자여, 입소 후엔 알아서 기란 말이어!」광주라 인천 놈 보단 말이 부드럽다.

  벌써부터 잡탕소대에 이상한 놈이 한 놈 있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5중대5소대는 마지막 소대로 전국 각 지역에서 신병훈련소에 개별 응시하여 입소한자(모두 청탁과 배경의 힘으로 입소한 신병)들만 모인 골치 아픈 소대라 잡탕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소대는 지방사투리 표본실 같기도 하고, 장군의 아들, 조카부터 나처럼 선배의 연줄로 들어온 사람까지 천태만상 각양각색의 <빽 ; Back ground>을 가진 인간표본들이 모인 소대였다.

  나는 커다란 전기이발기계를 처음 보았다. 서무사 말대로 이발을 하는 것이 험하기 짝이 없다. 절반은 뜯기면서 깎이는데 이발시간이 일분도 안 되는 것 같다. <아야!>소리를 무의식적으로 지르면 왼손에 들고 있는 이상하게 생긴 목탁방망이 같은 지휘봉이 머리를 목탁처럼 때렸다. 나는 아픈 것을 꾹 참고 매를 맞지 않았다. 내가 독종에 속했다는 별명이 붙은 것은 이 때문이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그토록 잘나고 못난 놈 따지던 신병들이 머리를 홀딱 깎고 군복을 입으니 키 크기만 다를 뿐 똑같은 무기력한 신병이 되었다. 예비교육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기합의 종류와 기합 받을 때의 자세와 안전요령, 제대 할 때까지 비품으로 사용했다가 반납을 해야 한다는 관품(침구 방한복, 약 정복 및 전투복 식사도구 등)의 정리정돈, 총기의 수입, 내무반 청소, 식사시간과 취침시간 엄수 등 잡념을 가질 여유란 조금도 없었다.

  점호를 마친 취침시간 직전이면 어김없이 단체기합으로 야전삽자루나, 철 침대 연결봉으로 엉덩이 석대 이상을 반듯이 맞아야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통상적인 기합도 모두 내 한사람의 잘못이라고 나를 핍박한다. 내가 본격적으로 따돌림 당하기 시작하던 1959(4292년10월05일 92기10차)입소 선서식을 일주일 앞둔 토요일 저녁 서무사란 놈이 향도와 수군거리더니 돈을 거두면서 지난번 우리소대만 북해도 악어 잡이를 당했던 것도 내 탓이라면서 나를 치욕적으로 능멸하며 주먹다짐으로 나를 굴복 시키려고 공격을 했었다. 돈이 없어 한 번도 그들의 요구에 응해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에 몇 번의 수모를 참고 저항 없이 맞아 주었으나, 이번에는 생명에 위험을 느낄 정도로 지나치게 포악하여, 참다못한 나는 반항하여 그들을 제압해 버렸다.

  북해도 악어 잡이란 겨울철에 팬티만 입고 깊이 2m이상의 깊은 바다 밑으로 잠수하여 검은 갯펄을 양손에 쥐고 나와 운동장에서 검사를 받는다. 합격한 사람은 몸에 땀이 날 때까지 소리를 내지 않고 연병장을 구보해야 한다. 연병장 해변의 얕은 데는 검은 갯펄이 없기 때문이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숨겨둔 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는 기합이라 했었다.

  그날 밤 나는 소대장과 교관이 교대해가면서 밤새도록 친 <빳다>를 맞고 반신불수가 되어 소대장이 자기침대 밑에 나를 눕혀 숨겨두고 배식을 날라다 주면서 일주일을 누워 있게 하였다. 결국 나는 오른손을 들어 해병선서도 못한 채 담요로 가려진 침대 밑에서 입대식을 치룬 셈이 되었다.

  지금까지 덩치 값도 못하던 부산 대구 등의 경상도 신병들이 기를 펴고 힘자랑을 하게 되고, 향도는 대구 친구가 선임되었고 책임을 묻는다는 핑계로 서무사 임무를 나에게 맡겼다. 이후 신병훈련소를 수료 할 때까지 나는 한 번도 돈을 거둔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신병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부대로 이동하는 열차 안에서 <장>가란 성을 가진 인솔 대장이란 사람에게 이유 없는 뺨을 백 여 대나 맞았다.

  다음날 새벽, 용산에 도착하여 임지인 제2상륙훈련단본부(병부감실)에 신고를 하였으나, 양 볼이 부어 입을 열수가 없었다. 말도 못하고 약 일주일을 죽과 물을 마시며 의무실을 드나들었다. 돈 없이 훈련을 받고 배치를 받는 나까지의 시련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신병소대서무사는 훈련기간 중 주말 가족면회신청자 통지업무를 주로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 면회를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 특별면회신청이 왔다고 면회실로 나가보라는 연락이 있었다. 뜻밖에 정진일 친구였다. 그때 모교인 진해고등학교에서 대입준비를 하고 있었다. 너무나 초라한 나의 모습을 보고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면회실 옆 잔디밭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는 친구를 내가 먼저 부르자 놀란 듯 붙잡으며 눈물이 글썽이며 진원이, 너, 모습이… 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한 아름 들고 온 빵을 내 앞에 내어놓고 많이 먹으라고 한다. 나는 <너도 먹어라>고 한마디 한 후 아무 말 없이 그 많은 빵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 치웠다. 눈이 휘 둥글해 지도록 놀란 친구의 큰 눈이 지금도 선하다. 그 다음 주에는 정진일이와 이홍충, 이태량, 이광남이가 나를 면회 와 주었다. 금방이라도 탈영을 하고 싶었던 괴로운 순간을 참고 견딜 수 있게 해준 이 친구들의 덕분에 무사히 훈련을 마치고 사령부에 배치를 받게 되었다. 그 후에도, 나는 종암동에 있던 정회경, 정진일, 명륜동에 있던 김광석, 돈암동에 있던 이영화, 이선화 하숙집, 연희동에 자취하던 이홍충과 이광남, 신촌에서 인쇄소를 경영하던 이동일, 육군 카츄사에 근무하던 이태량과 정순관 김진일 등 많은 친구들을 돌아가며 자주 만났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 아픈 기억이 있다. 동대문 광장시장에 있던 박재구 친구가 키타를 배우겠다고 하여 가르쳐준답시고 자주 찾아갔다. 어른스런 박재규 친구는 군대에서 힘들 거라며 형님처럼 올 때 마다 용돈과 양담배를 사주면서 주일마다 나를 기다리기도 했었다.

  어느 날 친구가 마음속으로만 좋아 하고 있다는 아가씨를 지적하기에 그녀를 적극적으로 사랑한다는 표현을 해야 된다고 용기를 부추긴 탓에 정직하고 순진한 그 친구가 그녀의 냉정한 거절로 기어이 자살을 했다는 소문을 듣고 돌이킬 수없는 후회를 한 때가 있었다.

  1960년 4월 정국이 어수선하여 주말외출이 금지되고 모두가 단독무장으로 사령부 주위를 동초를 서게 되었고, 귀가 멍 하게 아프도록 철모에 학생들의 돌팔매를 수없이 얻어맞고도, 그렇게 화가 나지 않았던 것은 돌을 던지는 학생들이 모두 나의 친구들과 같다는 생각이었고, 그 학생들의 부정선거규탄이 옳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국민의 혁명이 성공하여 정권이 바뀌었으나, 민생고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고, 이기적 정치 broker들의 난무는 마치 식민역사가 종료되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가끔씩 내어 뱉는 지휘관들의 짙은 불만은 군내부에서 더 심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1961년 5월 김포 강화의 해병여단이 혁명군 선봉으로 서울에 진입하여 해병대 사령부에 주둔하려고 하였다. 선봉대장 김윤근 여단장은 내가 신병 훈련을 받을 때 직속상관인 교육훈련단장 이었고 당시 해병대사령관은 김성은 중장이었다. 처음 혁명의 성공여부를 가늠하지 못한 지휘관들은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의 갈등 속에서 여단병사들의 군수지원을 미루어왔던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 상황을 노골적으로 들어 내 보이는 것을 보고, 군부의 부패함을 나름대로 실감하기도 했었다.

  긴급 상황 속에서 정상적 근무를 하지 못하고, 자체경비를 위한 동초를 서게 되니 4.19형명 당시와 같이 학생들로부터 또 돌팔매를 맡는 꼴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병사들이 국민들의 돌팔매를 맞아주면서 부패한 지휘간의 체면을 세워주었다는 생각을 지금도 나는 지울 수가 없고, 공무원들의 부패가 지금도 나를 피눈물 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입증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1962. 2. 28. 나는 해병대사령부병무감실(제2상륙훈련단본부)에서 만기전역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