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야망의 고교시절

 

   <교훈이 바뀐 연유>

   1957년 3월 1일 하동초등학교 운동장의 삼일절을 기념행사 날이다. 자랑스러운 하동고교 취주악대15인조가 수실견장까지 붙여 멋을 부린 채 단상 옆에 널찍하게 자리 잡은 악대 석에 진을 치고 앉아 있다. 각급 기관장과 내빈들이 입장하고 평상시보다 많은 일반참관인들이 양쪽과 뒤편에 큰 울타리처럼 둘러있다. 경찰과 의용 소방대, 군청과 읍사무소 공무원들과 각 급 학교학생들이 가득하게 대오를 맞추어 멋지게 사열한 엄숙한 행사장 이였다.

  개회선언과 독립선언문 낭독, 애국가 봉창과 묵념 등 국민의례가 너무나 어설프게 마쳐진다. 멋을 부린 악대가 기대했던 것보다 너무나 어설프고 불안한 연주로 가까스로 애국가를 불렀고 묵념도 애국가 끝 소절을 간단히 부는 것으로 얼렁뚱땅 넘어갔기 때문이다. 곧이어 “삼일절 노래 제창!”하고 사회자의 지시가 내려지자 지휘봉을 든 초등학교 음악선생님이 단상으로 다시 가볍게 뛰어 올라가 밴드를 향하여 두 손을 높이 들고 멋들어진 제스처로 양팔을 한 바퀴 휘돌린 뒤 지휘봉 끝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악대를 향해 내리꽂는다. 그러나 장엄하고 정중한 취주악 소리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지휘자는 미처 자신의 지시를 알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한 번 더 천천히 유도하며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연주시작을 지시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연주전 조음을 하듯 삑- 빽- 뿍- 픽 하며 각각의 악기가 소리가 회초리를 얻어맞은 돼지새끼의 울음소리 같이 난잡하게 터져 나온다.

  아이쿠- 나도 모르게 탄성을 냈다. 나기가 막히다 못해 부끄러워 숨통이 멎을 지경이다. 행사장이 더욱 숙연해지고 웃음소리하나 나오지 않는다. 행사에 참가한 재학생들과 선생님들은 고개를 숙인 채 부끄러워 모자만 한번  더 푹 당겨쓴다. 단상의 음악선생이 다급했는지 육성으로 삼일절노래를 선창을 하면서 반주도 없이 힘없는 3.1절 노래를 간신히 마친 후 내려와 밴드들을 일일이 위로 해주며 다음에는 잘해보자고 기약하는 모습이 너무 고맙기도 했다. 사열대 맨 앞 간부의 자리에 선 나는 너무나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동고교는 시가행진도 빠진 채 교정으로 돌아와 버렸다.

  우리가 고교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하동고등학교 악대는 15인조가 넘었고 교회의 웅장한 성가를 연주할 정도로 정교한 연주 실력을 갖춘 취주악단이었다. 년 말 크리스마스 때나 관공서가 주체하는 국경일 행사 때에는 멋있는 연주로 애국가와 기념일노래반주를 해주었고, 다른 지역의 큰 행사 때에도 초청을 받기도 하고 개선장군들처럼 교정으로 돌아오는 악대의 모습이 영웅처럼 자랑스러웠다. 교내의 모든 행사는 악대로 인하여 언제나 즐거운 축제가 되었으며, 학교 당국과 재학생들의 인기를 독점하였다. 여름날 무덥고 지겨운 기념행사 후에 지친 발걸음으로 시가행진을 할 때 경쾌한 행진곡이 연주될 때면 우리들의 발걸음이 날듯이 가벼워지는 마력을 주기도 했었다.

  예술이란 어렵고 힘든 경지를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진 것을 이때 알았고 이러한 힘을 터득했을 때 인류를 위한 진실한 봉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본교 입학면접시험 때 내가 존경하는 인물로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를 지적한 이유가 예술과 종교와 의학과 미술 등의 종합예술의 힘으로 인류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는 현실의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나는 이때부터 그를 닮아보겠다고 틈나는 대로 무엇이든 열심히 배워 황금 같은 학창시절을 허송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우리가 고등학교 입학을 하였을 때는 그렇게 연주를 잘하던 선배들은 거의 졸업을 해버리고 3학년에 한 둘 남은 선배가 신입생과 2학년을 가르치며 일 년을 가까스로 지탱해 오다가 연습을 게을리 하면서 꾀만 부리는 후배들이 지겹다는 듯 미련도 없이 졸업을 하고 떠나버렸다. 그 후 지금의 3학년들과 2학년 몇 사람을 합하여 음악연습을 한다며 가난한 학교재정으로 대접을 받으면서도 멋만 부리며 시간을 허송하여 3.1절 행사를 망친 것이다.

  당시 모교의 본관이라고 해야 판자로 지어진 여섯 개의 교실이 전부였고, 창고 같은 교무실 앞에 음악 강당을 지은 후 나중에 교무실을 이곳으로 옮기고 교무실은 결국 창고가 되어 이곳에 악기를 보관했던 것이다. 복도는 교실 여섯 개를 이은 통로라 그렇게 크지 않아 복도의 말소리가 수업 중에도 교실에 들렸을 정도였다. 2학년학생운영위원 이었던 나와 손병옥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조용한 복도 한가운데서 서로 성토하듯 선언한 후 3학년 간부들이 학교예산을 낭비하면서도 악대를 충실히 감독하지 못한 잘못을 반성하고 사후대책을 세워 공개 사과해야 한다고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전교생은 조용히 듣기만 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수일이 지나자, 3학년들은 2학년 학생간부들이 학내주도권을 가지려고 하극상을 선동하여 교칙을 어기며 교내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무고하여 졸업선배들까지 동원하여 1, 2학년 전원을 운동장에 집합시켜놓고 단체기합으로 다스렸던 것이다. 1학년과 여학생들은 모두 꿇어 앉혀놓고 2학년 남학생들은 몸통을 엎드려뻗쳐 놓고 몽둥이로 때렸던 것이다.

  2학년을 대표한 나와 손병옥은 학생간부들끼리 협의하여 해결하자고 제안하였으나 힘으로 자존심을 앞세운 3학년들은 학교당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 2학년을 방과 후에 교문을 막고 교정에 집합시켜 단체기합을 주었던 것이다. 무고한 하급생 전체를 볼모로 2학년 간부들을 욕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하였다. 참다못한 2학년 간부들은 기합을 중단시키지 않으면 등교를 거부하겠다고 학교 측에 항변을 하기도 하였으나 3학년들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우리는 우울한 상급생들에게 차마 공개적 항거할 수가 없었다.

  나는 3학년간부들을 일일이 찾아가 잘못을 성토한 것은 내 한사람이므로 개인문책으로 끝내고 연대 기합을 중지하라고 요구했으나, 그러나 3학년학생간부들은 나의 개별적 면담을 기피하면서 단체기합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명분도 없이 지나친 기합을 계속 받던 손병옥과 내가 참다못해 일어나 2학년학생위원의 자격으로 말한다고 전제하고 모두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한 후 교문을 통하여 유유히 나가자 2학년들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가 학교를 나와 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선생님의 추적을 피한 뒤 이웃 친구들과 상의하여 하동읍은 우리가 책임지고 여타지역은 이미 고인이 된 진 용주가 비상연락망을 만들겠다며 나섰다. 악양 화개면 지역은 손병옥과 박준식, 전라도지역은 박수묵과 서대식, 신기 목도는 손영배와 이정배, 적량 고전면은 박성태와 차연석, 횡천 청암면은 정택균 등을 비상연락책임자로 정한 후에 등교거부에 돌입하였다. 등교거부 2주일이 되는 날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까지 부모님을 찾아와 모든 잘못은 불문에 부칠 것이니 등교를 하라고 말씀하셨고, 이를 거역하면 형사문책을 받도록 혼을 내주라는 부모님의 엄명에 비상망을 가동하여 등교를 하였던 것이다.

  2학년친구들이 고맙다고 생각된 것은 개별적 강압과 설득은 거부하다가 나와 학생간부들의 권유를 기다렸다는 듯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등교를 하여준 믿음직한 우정이었다.

  그 날 오전은 교무실에서 교장선생님주재 하에 훈육담당선생님, 담임선생님과 2학년학생간부들이 연석하여 3학년들이 제시한 요구조건을 토의한 후 2학년학생간부 전원은 교칙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결정되었으나 3학년들과 화해조건이 제시된 이상 그때가지는 처벌을 유예하겠다고 하여 우리는 이를 자신 있게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장선생님께서 염려하셨던 2, 3학년간의 화해조건은 이런 것이었다. 이것은 3학년들의 제안 중 악대의 과오를 개인학생자격으로 성토한 이 진원 학생이 악대의 관리감독을 약속한다면 2학년학생간부들의 등교거부사건을 묵인하겠다는 것이었다. 사고의 발단이 된 것은 악대의 무능을 분별 없이 성토한 나의 침착하지 못한 행동 때문이었음으로 3학년들의 요구를 기피할 명분도 없었다. 더구나 누구든 악대를 복원하여 모교의 자랑을 되찾아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었고 교내사고를 평온하게 마무리하기 위해서도 승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로 인하여 많은 학생간부들이 교칙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하나 나의 노력여하에 따라 모두가 면책이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정신무장을 했던 것이다. 집에서 형님이 배우던 키-타를 한두 번 만져보았을 뿐 취주악기(吹奏樂器)에 대하여는 문외한이었다. 모교의 체면을 망쳐버린 악대에 화풀이로 큰소리는 쳤지만, 수학보다 공부하기 어려운 것이 음악이라고 들어온 내가 악대를 복원해야 할 벌칙책임은 걱정되는 시나리오가 분명했던 것이다. 책임을 맡겠다고 나선 나는 3학년과 졸업선배들을 수차 찾아가 지도해 주기를 간청했으나 도움은커녕 보관한 악기마저도 반납해 주지 않은 채, 큰소리친 네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사고를 낸 그 수준으로 우리가 바라는 도움을 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부득이 3학년들과 졸업생들의 비협조 이유를 담당선생님에게 말씀드리고 학교에서 직접 악기를 회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반환된 악기는 모두 수리를 해야 쓸 수 있을 정도로 훼손되어 많은 예산이 다시 낭비되는 일이 생기자 학교당국도 나를 원망하기 시작하였고 악기회수와 보관수리 등 악대의 모든 책임을 전가하듯 한 학생에게 완전위임을 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교무당국은 나에게 창고에서 모든 악기를 당장 들어내라고 명령하였던 것이다. 하동고교의 자랑이었던 악대가 한 학생의 성토한마디로 그 흔적마저 사라져버리는 것 같다는 학교 측의 비유가 중압감으로 덮쳐와 밤을 지새며  걱정하는 날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이후부터 나는 학교의 미운 오리새끼가 되었고 문제를 만들어 내는 독불장군 같은 학생간부라는 라벨이 붙게 되었다.

  삼월이 다 가고 사월이 되었다. 나의 생각은 자나 깨나 악대를 복원하여 6. 25행사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지도자 없이 연습도 되지 않을 뿐더러 한정된 연습조건에서 책임만 추궁하는 종전의 방식에 질린 듯 밴드조직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친구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학교에서 악기를 인수하여 각자가 보관책임을 지며 언제어디서든지 연습을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설득을 하자 악기를 갖고 싶었던 친구들은 모두 나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예전엔 연습을 하기 위해 악기반출을 하려면 학교장의 허락을 받아야 했었는데, 이제는 악기를 치워달라는 학교 측의 책임회피를 위한 명령을 받았으니 교육적 가치를 상실한 잘못된 사고의 전환이란 의미를 지금에야 알 것 같기도 하다.

  학교의 지시에 따라 어느 토요일 오후 악대부원과 나는 서무직원에게 인수증을 써주고 창고 문을 열었다. 먼지가 뿌옇게 앉은 채 청록이 낀 악기와 북이 겨우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이렇게 훼손된 것을 보고 모교의 명예가 이렇게 짓밟힌 흔적 같아 가슴이 찡하게 저렸다. 그 많았던 좋은 악기는 거의 없어지고 겨우 남아있는 것이 트럼펫 2조, 클라리넷 1조, 튜바1조, 트럼본 2조, 큰북과 찢어진 작은북이 전부였다.

「와- 이것 갖고 어찌 연주 하노?!」

「이기 소리가 나것나?」하며 친구들이 한심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우리는 2학년 교실로 악기를 모두 옮겨 놓고 악대를 조직하려고 하는데 악기를 조금도 불 줄 모르는 나는 악기를 불 줄 아는 친구들이 제안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홍충과 새로 전학 온 유기태가 트럼펫을 맡고, 고인이 된 김정일 과 문 철주가 트럼본, 이 광남은 튜바, 마지막 하나 남은 클라리넷을 내가 맡아 배우기로 하고 큰북은 고인이 된 진 용주 작은북은 1학년 차 재수에게 맡긴 후 7-8인조의 엉성한 미니밴드가 조직된 것이다.

  내가 맡은 클라리넷은 탭이 많이 없었고 리드 마우스마저 깨져 당장 수리비가 상당히 들었다. 부산에서 악기를 수리하는 사람에게 기본과 고음부 연주방법을 간단히 배워와 소리를 낼 수 있을 즈음 나는 바로 홍난파의 봉선화를 고저음부로 악보를 보며 연주를 해보았다.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신념에 묻힌 바른 사고는 만사를 가능하게 만들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 같다. 모든 친구들이 초보인 내보다 뒤질 새라 선의의 경쟁심으로 많은 연습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매주 토요일 방과 후에 모여 명곡이나 유행가를 연주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학생들이 박수를 쳐줄 정도가 된 것은 불과 달포 남짓한 기간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형님에게 놀러 오신 중학교 3년 선배를 만나 연주지도를 부탁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그는 부산시향 트럼펫주자인 김춘기 선배였다. 그 선배는 짬을 낼 수도 없을뿐더러 모든 악기의 특성을 다 알지 못해 어렵다고 하시며, 우리형편에 가장 알맞고 반드시 필요한 진짜 유능한 사람을 나에게 소개해주겠다며 나와 같은 학년의 진주고교 학생을 소개 해 주었던 것이다. 그 지도자는 나와 동년배인 진주고등학교 제29회 악대부장이었다. 그의 부친은 <진주 고약국> 이란 한방약국의 명성을 가지신 어른이었다.    그 친구도 지금은 고인이 된 성은 고씨며 이름은 <태치>였다. 그는 모든 취주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달인이었고 악기의 특성까지도 완전히 터득한 경지에 있음으로 취주악화성을 위한 악곡의 작․편곡까지도 능숙하여 빈틈없는 지도를 하여주었다. 하나의 악곡을 연습단계부터 고차원적 연주형식으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연주를 할 수 있는 응용능력을 갖도록 지도해준 진정한 연주지도자였다.

  누구나 학창시절의 친구가 있다. 그 학창시절의 친구는 누구에게나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신의를 위해 아무것도 바라거나 내세우는 것 없이 언제나 친구를 배려하며 베풀어 간접적 성취감으로 자신의 행복조건을 삼아 아름다운 우정을 지키려는 친구가 있다.

  다른 하나의 부류는 언제나 시기심을 제 목숨보다 아끼며 자기체면만 앞세워 학창시절 우월했던 친구가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기를 바라고 지금의 우월함을 자랑하며 <학창의 우등생이 사회의 열등생이란> 문구를 생활신조처럼 오해하며 인생을 이긴 듯 쾌감을 갖고 모함하는데 익숙한 종류의 이름뿐인 친구다. 학창의 친구는 반드시 이 두 가지 종류뿐이다.

  고태치란 인재가 나를 신의가 있는 친구로 여겨주면서 내가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준 첫 번째 종류의 진실한 친구며 나로 하여금 올바른 의지를 가진 인간이 되도록 만들어 준 친구이기도 하다.

  동년배의 친구가 어떻게 이러한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 방법을 물어 보면 답답한 질문을 한다며 그런 시간에 마우스피스나 입에 맞추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 친구의 적극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그토록 어렵다고 생각했던 행진곡과 경쾌한 폴카를 연주할 정도가 되었다.

  지도를 하던 친구는 6. 25행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적은 수의 악기로 야외 행사에 참가하려면 클라리넷보다 트럼펫이 리드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좀 늦은 듯싶더라도 악전에 좀 밝은 진원이가 트럼펫을 배워 리드를 해야 행사를 치를 수 있을 것 같다고 경고처럼 제의한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코치인 태치가 시키는 대로 나는 유 기태의 트럼펫을 받고, 유기태가 트럼본을, 문철주가 클라리넷을 받아 다시 배우게 되자 연습이 도무지 진전되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에 원래악기를 불자고 하자 이렇게 무책임한 악대가 어디 있냐고 하며 행사장에서 효과를 내지 못하는 연주는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며 지금까지의 죽을 고생을 하며 노력하는 것은 오직 이번의 행사를 완벽하게 이끌어 하동고교 악대의 명예를 복원하는 중대한 목적이 있다는 당초의 신념이 어디로 가버린 것이냐고 질타한다.

  내가 부질없이 성토하여 없어져버린 그 악대를 다시 살려내려고 한다면 어설픈 노력으로 그 뜻을 이루기 어렵다고 지적하는 것 같아 손에 땀이 났다. 피나는 연습 없이 멋만 부린다고 악기가 저절로 소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연주자가 악기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자기 악기와 정을 들이지 않으면 그 악기는 자기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연주지론이다. 겨우 일주일을 불어보고 못하겠다는 사람이 악대를 복원하겠냐고 화를 내며 다그친다. 내부터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모교의 명예를 복원할 수 없겠구나 싶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쓰거나 밭이나 산에서 트럼펫 마우스피스를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를 때까지 가지고 다니며 불었다. 산 속이나 들판으로 나와 나팔을 두 손으로 기도하듯 붙들고 무아지경으로 트럼펫을 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입술에 붙은 마우스피스가 웃으며 노래를 부르듯 조용한 저음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듯하였다. 그래서 양 볼에 힘을 주며 높은 소리를 내어보았더니 끝없이 올라갈 것 같은 멋진 소리가 나지 않는가! 참 신기하였다. 거짓말 같은 나의 넋두리를 다 듣고 난 고태치 친구는 네가 나에게 물었던 연주방법을 이제 다 알아냈다고 하며 웃었다. 악기의 연주는 말을 배우듯 노력하는 시간의 길이에 따라 소리도 달라진다고 하였다. 남의 재주나 능력을 부러워하는 것은 스스로 나태하며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적은 숫자의 악대지만 야무진 연주를 한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우리는 예전의 악대수준을 넘어선 유능한 연주자들로 변해 있었다.

  그 당시 때마침 하동교육청이 주관하는 어린이 재동 예술제를 5월 5일 개최한다고 하였다. 이날에 초중고 학생들이 연극경연을 겸하여 찬조 출연을 하면서 고향의 예술동호인이나 독지가들은 고향의 한 축제로 승화시키겠다고 하며 대단한 의욕을 보였던 것이다. 우리는 하고의 악대가 명예회복을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로 만들어야한다고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 날의 멋들어진 연주는 하동군재동예술제를 더욱 멋지게 만들어 주었다. 하고의 밴드는 이때부터 자타가 인정하는 밴드가 되었고 실력을 인정받아 유랑극단의 초청연주에도 응할 정도가 되었다. 3학년들도 함께 동참한 하동군재동예술제의 성공에 고맙다는 찬사를 보내며 우리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모교악대의 명예를 회복하여준 사실을 인정해 주기도 하였다.

  6. 25. 기념행사에 하동고교가 참가하라는 군청의 연락이 있었으나 악대를 동원해야 한다는 연락은 없었다. 학교에서도 3. 1절의 창피스러웠던 기억 때문에 지금 우리의 노력을 과소평가 하거나 의심하여 출장연주를 강력하게 권유하지 않았다. 예전보다 작은 인원수에다 다 부서진 낡은 악기로 연주를 해본들 잘 하기는 기대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나는 직접 하동군청홍보담당관을 찾아가 악대석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공보관의 말이 군청에서는 밴드를 유치할 예산이 없다고 했다. 매 행사 때마다 연습경비와 식대, 행진수고비 등의 상당한 예산을 지급해 왔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학생이 자발적으로 행사에 참여하는데 무슨 예산이 필요하겠느냐며 앞으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 국경일 행사에는 예산을 요구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그렇게 사정하여 단상 옆에 초라한 예닐곱 개 정도의 의자를 얻게 되었고 악대의 견장이나 멋도 부리지 않은 일반교복을 입고 흰 장갑도 끼지 않은 채 구경꾼처럼 7-8명의 초라한 밴드가 단상옆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그때의 음악선생님이 리드인 나를 찾아와 예전의 절반도 안 되는 악대로 무슨 연주를 할 수 있을 가 싶었든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무엇을 연주 할 줄 아느냐 물으며 연주 할 수 있는 곡만 지휘를 맡겠다고 하신다. 행사에 삽입된 모든 악곡을 연주 해 드릴 테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멋쩍은 듯 밴드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 걱정스럽다고 하셨다. 나는 병든 코끼리보다 날쌘 표범이 작은 행사에는 유리하다고 안심을 시키며 선생님이 주저 하지 말고 자신 있게 지휘만 잘하여 달라고 당부하였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정적이 감도는 순간 나는 조용히 일어나 < 지상에서 영원으로>란 영화의 주인공<몬티>가 친구의 장렬한 전사를 애도하여 명복을 불어주는 우정의 명상곡을 불기 시작했다. 행사장은 소름이 끼친 듯 모두가 굳어 있었고, 학생들과 선생들의 눈시울이 붉어 있음을 확인 할 정도로 멋지고 감동적인 독주를 한 것이다. 연주가 끝난 후에도 사회자가 정신을 잃은 듯 한참 후에야 바로! 하며 소리친다. 목이 뫼인 듯하였다.

  애국가 제창!

  음악선생님은 안심이라도 한 듯이 화색이 만면하여 단상에 뛰어 올라와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여 묻는다. 고개를 숙여 대답해 주었다. 거만하지도 않게 조용히 밴드를 행해 전주곡의 시작을 알린다. 지휘자마저 깜짝 놀랄 정도로 우렁차고 절묘한 화음이 끝 소절을 전주로 뱉어낸다. 염려했던 7인조의 실력은 상상을 초월한 실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행사에 참가한 모든 군중이 이처럼 큰소리로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마치 악대의 연주소리보다 더 크게 부르려고 경쟁을 하는 것 같았다.

  6. 25의 노래제창!

  초등학교 합창단어린이 40여명이 음악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단상에 오른다. 악대가 없는 행사를 위해 미리 준비한 합창단이었다. 음악선생님이 나에게 첫 절을 전주로 조금 빠른 어린이 템포로 연주를 해달라고 미리 부탁을 하고 가셨다. 의기투합한 우리는 어떠한 조건도 거침없이 해주었다. 지휘자의 화려한 제스처가 어린이들의 울분을 자아내듯 지휘한다. 정신을 쏟아 부은 우리의 연주가 어린아이들의 작은 입을 통하여 터져 나오는 듯 아름답게 어우러진 6. 25의 노래는 너나없이 가슴이 떨렸다고 말해 주었다.

  사회자가 시가행진을 한다고 선포한다. 내가 처음 알기로는 악대가 없기 때문에 시가행진은 생략할 것이라고 했었다. 우리가 맨 앞에서 하동읍을 돌며 읍민들에게 우리의 실력을 공공연하게 마음껏 자랑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며 친구들을 독려하였다. 친구들은 나의 말을 무조건 신뢰하고 따라 주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언제나 먼저 베풀거나 능력을 보여주고 그 뒤에 인정을 받는 예술인이 되자고 신조처럼 말해왔다.

  군청 공보실장이 찾아와 시가행진을 유도 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우리는 좋습니다하고 흔쾌히 승낙하였다. 그때서야 지난번의 일을 사과하며 수고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교문을 빠져 나와 경찰서 앞을 지날 때 우리의 장끼인 비바 폴카와 헤렌 폴카 등을 메들리로 바리에이션을 더하여 멋들어진 행진곡으로 만들어 거리의 밴드처럼 자유로운 모습으로 연주해 주었다. 길 가던 사람들도 멈춰 서서 박수를 치며 움찔거리며 즐거워했다.

  군청 앞은 읍내 중앙 통이라 명곡이나 대중가요, 미국의 째즈와 팝송까지도 연주하였고 옛날 유행가 책에 있던 군함행진곡이라는 노래까지도 멋들어지게 연주를 하였다. 갑자기 교장선생님과 훈육주임이 앞으로 뛰어와서 지금 연주하는 곡이 무슨 곡인지 알고 연주하느냐고 당장 멈추라고 까지 하시며 교정에 돌아오면 징계를 하겠다고 엄포를 하시면서 은근히 걱정을 하신 기억도 새롭다. 그런데 우리가 자랑스럽게 연주한 음악 때문에 친구를 위해 항상 배려하며 희생정신으로 봉사하는 좋은 친구가 죄 없이 미움으로 지목되어 결국은 퇴학을 당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언제나 미안한 그 마음을 지니고 있다.

  6. 25행사를 잘 마치고 돌아온 학교장은 2학년 학생간부들을 모두 교무실로 불러 악대를 재건하라고 했더니 유행가나 부르고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금지 곡을 연주하여 또 학교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하였다. 그 책임으로 지금까지 유예해 왔던 2학년간부들의 징계를 집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당시 학생간부들 중에서도 손병옥과 나를 지목하며 꼭 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던 두 선생님이 계셨다. 등교거부를 그렇게 말리시던 두 분의 말을 기어이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밴드가 객관적인 인정을 받았을 경우 모든 것을 불문에 부치기로 약속한 학교 측이 나의 연주잘 못을 빌미로 손병옥과 나의 과오를 들춰내며 처벌을 하려는 것이다.

  손병옥은 아무 잘못도 없이 최선을 다한 우리를 개인의 감정으로 처벌을 하려는 의도가 무엇이냐고 따진다. 나는 안절부절 하며 손 병옥의 옆구리를 찌르며 참으라고 말린 뒤 무슨 악곡인지 잘 모르고 연주한 것이라며 조심하겠으니 용서를 해달라고 사정을 하였다. 그러나 그 뒤 교장선생님은 조용히 마무리 될 수 있는 상황을 버릇없는 행동으로 너희들이 일부러 선생들을 무시하는 바람에 그렇게 고생을 하고서도 원망을 듣게 되었다고 하시며 기어이 손병옥을 무기정학, 손병옥과 함께한 서대식을 2주정학 나를 1주일 정학시키고 다른 친구들을 견책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 뒤 불공평하다며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간부들의 탄원으로 손병옥은 3주 정학으로 처벌이 가벼워 졌다. 정학이 끝난 뒤에 수차례 손병옥 친구를 찾아가 제발 학교에 나오도록 설득하였으나 기어이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지금도 손병옥 친구가 학교를 나오지 않은 이유를 잘 알 수 없다. 나는 항상 손병옥 친구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듯한 미안함 때문에 군대생활을 마친 후에도 상당기간동안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난다. 고희를 바라보는 지금에서야 부담 없이 고백한 친구의 솔직한 회고다. 그때 미운 오리같이 그토록 자기를 미워하던 두 선생이 들어 자기에만 중벌을 주는 것이 싫은데다 때마침 부모님을 대신해서 길러주고 아껴주셨던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별세를 하시는 바람에 당장 가정을 이끌어나갈 책임감 때문에 차일피일 자퇴의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라고 변명을 하면서 나의 마음을 읽어 주었다.

  단체기합을 공개적으로 거부하며 학생들을 선동하여 돌려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서 대식과 손병옥을 붙잡기 위해 악착같이 섬진강 나루터까지 따라오며 누가 이기나 보자고 했던 손 준규선생의 어질지 못한 시새움의 얼굴이 지금도 생각난다. 그는 기독교인이다. 진실로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침을 튀기면서도 정작 자기는 인자한 마음을 가져야 할 스승의 도리를 알지 못했던 자존심만 강했던 이중적 인격이 지울 수 없는 나의 나쁜 기억이다.

  먹까마구란 별명을 가진 황정생 선생님도 횡천 정택균 친구의 집으로 피신해 버린 나를 찾아 오라고하며 부모님을 협박하며 형사처벌을 받도록 고발을 하겠다고 위협하셨던 잔인한 모습은 스승으로서 올바르게 하신 언행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하신 아버지의 조용한 말씀이 기억난다. 심지어 이웃사람들도 꼭 일본군 헌병이나 왜경 형사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진짜선생인지 구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 두 분의 선생님으로 인하여 아름다웠던 학창의 추억에 돌이킬 수 없는 억울한 우리의 상흔을 남긴 것이다.

  음악은 국경과 사상을 초월하는 것인데 그 당시에는 모든 예술도 통제를 받았다. 그랬듯이 지금은 격세지감이 난다. 하고의 악대가 연주를 잘한다는 소문은 좁은 군내에 삽시간에 퍼져 교육청과 각급학교의 학예행사나 행정기관의 지방예술제 심지어 종교단체의 행사까지도 우리의 연주가 필요하였다. 모교의 악대가 고향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아름다운 신본교의 설계도만 게시판에 붙어있고 공사가 진척되지 않은지 3년이 되었다고 한 조감도를 지켜보고 왔던 나는 기초공사라도 우리들의 손으로 만들어 보자고 전교생에게 선전포고와 같은 공개제안을 하였던 것이다. 악대를 해산시킬 때의 무모한 성토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성금을 모아 기초공사를 하는 일은 악대를 복원하는 일보다 더 쉽다고 생각했다. 나의 이러한 논리가 전교생의 지지를 얻어낸 것도 악대를 복원한 진실한 노력의 결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전교의 학생들에게 이러한 제안을 자신감 있게 웅변했던 것도 밴드를 앞세웠기에 용이했던 것이다. 2학년을 대표한 한 학생의 말을 믿고 심지어 3학년들까지도 호응하여 재동예술제에 참가하여 모교의 기초공사 성금에 협력하여 주었다.

  본교건물의 기초공사를 학생들의 손으로 만들어 졌다는 사실과 이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학년별 학급별 남녀별로 경쟁하듯 현금이나 쌀과 보리 콩 고구마감자 등 현물도 모아 팔았다. 아무것이나 자금이 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방학이나 농번기에 사골농촌과 고향의 선각자들을 찾아 봉사하고 노력하며 성금을 얻어왔다. 우리의 밴드는 학생들의 사기와 긍지를 심어주는 초병의 임무를 다했던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웠던 우리의 이야기가 학교의 역사에 남겨지지 못하고 후배들의 긍지를 살리는데 조금도 교육적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은 학창시절의 시새움을 사회에서도 적용하여 주인공의 출세도가 낮은 탓이기 때문이리라. 위대한 신념과 이념이 높은 벼슬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도 토요일마다 책가방을 친구에게 맡겨두고 전라도 다압면으로 나무를 가신 아버지를 도와드리기 위해 배가고픈 것도 잊고 달려가 먼 산 중턱에서 곰방대를 피시며 나를 기다리는 연만하신 아버지의 하얀 긴 수염이 석양빛에 붉었다 푸르게 비치는 것 같았다.

  나뭇짐을 받아 짊어지고 앞을 걸어가는 나를 보시고 아버지는 <구용이가 이제 장골이 다 되었구나!>하시며 흐뭇해하시던 때가 진정한 행복이었다. 

  도대체 예수 석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칼 마르크스와 헤겔, 공자와 장자의 벼슬이 높았다고 말한 사람이 어디에 있던가. 2학년 학생회장인 내가 제안한 “더 좋은 학원의 건설”을 목표 달성 때까지 한시적 교훈으로 허락한 선생님들의 교육열이 진실한 사도라 여겨진다.

  졸업식장에서 <모교의 영웅> 칭호를 받은 학생회장이라고 별칭 해준 총동창회장의 표창장이 얼마나 값진 것임을 깨달은 학생이 고희를 이마에 붙이고 후배를 위해 이 글을 쓴다.

  나는 지금도 사회적 지위는 없다. 그러나 재학생들은 모두 나와 같은 아름답고 진실하고 의욕적인 학창생활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권고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