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중학교 기마친구

 

   우리가 중학교 입학시험을 국가고사로 치렀다. 지금의 대입수능시험 같이 득점결과를 가지고 전국 어느 중학교나 소신 지원할 수 있는 중학교입학제도가 그 당시 처음 시작되어 우리가 제2회 일제고사를 치르고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하동중학교 입학당시 여학생인 정후자가 400점 만점에 390점을 얻어 우리 동창 수석으로 입학을 하였다. 그 외 다수의 학생이 380점을 상회하는 고득점자가 많았으나, 나는 그때 제일 하급인 260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학기가 지날 즈음 하복도가 전학을 왔는데 선생님이 전학생소개를 하면서 국가고사 400점 만점을 받은 수재가 우리학교에 전학 온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고 말씀하셨다. 말음 약간 더듬으며 조용하고 차분했던 그 사람이 지금도 그 성정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더듬고 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하복도에게 들어맞는다. 

  소전 머리에 있던 우리 집도 우시장이 목넘으로 옮겨간 후부터 여인숙 영업을 포기하고 하숙집으로 바꾸어 주로 공무원과 시골학생들을 합숙시켰는데 이때 악양의 손길태, 손병권, 횡천의 정택균이가 우리 집에서 함께 중학교를 다녔다.

  우리집 뒤로 두 번째 차씨 집에는 손병옥이가 하숙을 하였다. 손병옥은 우리들 보다 나이가 두어 살 위라서 우리보다 체격도 컸고 어른스러웠다. 모든 면에서 믿음직하고 신뢰감이 있는 학생이었고, 모두가 그를 형님처럼 어려워할 정도로 정의로웠다.

  당시 면지역에서 하동중학교를 다니면 유학생이라고 말을 하였다. 시골에서 생활이 다소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하숙을 시켰고, 좀 어려우면 자취를 시켜가며 읍내로 유학을 보냈다. 횡천 남산에서 조동구, 적량에서 한용운, 박성태, 차연석, 김경선, 작은 이숙자 두 여학생이 통학을 하였다. 제일 먼 거리인 청암에서는 양대석이가 통학을 한 것 같다. 
  우리들은 적량에서 통학하는 친구들을 바위고개라고 불렀고, 금남 갈사에서 송은용이가, 양보면에서 노정옥 화개면에서 정기범이 통학할 때도 있었다.
  하동읍내 변두리 화심에서는 여청홍, 여종현, 고동골은 채태야, 흥용에서 서환생이 통학을 하였고, 적량 돌다리 쪽에서 김청재와 염정의, 신기리에서 이정배, 홍길찬, 목도에서 손영배, 김영광이가 상당히 먼 길을 통학을 했었다. 그 중에서도 재미있던 이야기는 비교적 가까운 배섬에서 통학을 하던 설상태 친구는 지각과 조퇴를 멋대로 하는 바람에 친구들이 배짱 좋은 have no(세상에 없는) 대학생 제1호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었고, 설상태 자신이 이를 즐겨 쓰기도 했다. 그 다음 제2호 해부노 대학생은 홍길찬 이었다. 홍길찬이도 지각과 조퇴가 너무나 잦았던 탓이다.
이때에도 요즈음의 신자유주의 학생처럼 학업을 뒷전으로 생각하던 학생이 상당히 많았던 것은 생활의 빈곤과 가정문제였다. 지금도 그 원인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은 역사는 반추된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때와 같은 학생과 비슷한 선생님도 한 분 계셨다. 입학생은 늘어나는데 전후의 재정이 궁핍한 사립학교재단이사회는 교실이 항상 부족하여 광평송림이나 전매서 창고 등을 빌려 수업을 할 때가 많았다. 그 당시 영어를 가르치시던‘이양하’선생님이 계셨는데 수업시작 오분 후에 입실하시고 수업종료 5분전에 정확하게 퇴실하시던 문이라 학생들은 오분전후 손목시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셨다.
  하루는 광평 전매서 창고에서 영어 수업을 받던 날인데 영어 수업시간만 되면 학생들은 자연스레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선생님이 멀리서 보이면 그때야 모두가 교실로 다람쥐처럼 뛰어가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택뒷문을 나서는 이 양하 선생님을 보고 안숙자가“양양한 양하가 교실 앞으로 한 손에 출석부 들고 양하가 온다!”하고 큰소리로 용진가에 개사하여 노래를 불렀다. 안숙자는 예쁘고 키가 작다고 하여<개도토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숙자는 항상 호탕하게 웃으며 친구들을 곧잘 우겼다. 그때 교실 안의 학생들이 폭소를 하였는데, 운이 나쁘게 제일 늦게 교실로 들어온 홍현자가“양하온다, 양하온다”종알거리면서 제일 늦게 자리에 앉는 것을 본 선생님은 자기를 놀려 학생들을 웃긴 줄 알고 홍현자를 나오라고 하며 화를 참지 못하였다.
  비교적 온순하셨던 이 선생님이 제일 작고 조용한 홍현자를‘잘 걸렸다’는 듯이 학생들이 보기가 미안할 정도로 출석부로 심하게 구타를 하면서 자신이 습관적으로 지각을 하던 잘못을 은폐하려고 시도하는 것 같았다. 진짜 죄는 안숙자가 지었는데, 억울한 매를 홍현자가 맞은 꼴이 되었다. 홍현자도 박진식이처럼 키는 작아도 달리기를 잘하여 여학생반의 릴레이선수이기도 했으나, 비교적 말이 없고 잘 나서지 않던 조용한 학생이었다.

  통학생들이 많고 지역에서 모여든 학생이 많아지다 보니 학교 내에서도 선후배는 지역별로 자연스럽게 단결이 되어 읍 면 또는 지역 단위별로 자연스럽게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되었다. 어떤 때는 읍내와 유학생지역으로 나누어 경기나 운동회를 열 때면 악양면과 횡천면이 제일 강하여 읍내 팀이 질 때가 허다하였다.

  통학을 하면서도 공부를 잘했던 한용운은 남학생의 수석이었고, 여학생의 수석이면서 전교 일등자리를 지키던 정후자에게 필적하여 남학생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한용운은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고 여간해서 화를 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공부를 잘못했던 나에게 짝꿍이라고 늘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었던 그 친구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에 생활의 변화로 지금까지 만나보기가 힘들어 지게 되었다. 한용운도 손병옥, 박준식 처럼 뒤늦은 복학으로 나이가 우리들 보다 두어 살이 많았다. 그래선지 항상 형님처럼 양보를 많이 하는 선비의 어진기상이 있었다.

  축구나, 씨름, 달리기 등 모든 운동에 달인처럼 두각을 나타내면서도 수학공부를 잘했던 친구가 박준식 이었다. 키는 작아도 차돌처럼 야무지게 생긴 딱발아진 몸집에 눈망울이 큰 얼굴이라 나이가 어려 보였던 박준식이도 우리들 보다 두어 살이 많았다는 것을 요즈음에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손병옥은 그때도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 같은 학생으로 여겼다.

   기혼자로 어른 대접을 받던 친구가 정학원 이었다. 전라도에서 다니는 학생들을 너도나도 친구라고 불렀는데 다압면에서 이영화, 이선화, 서대식, 정학원, 정영환, 서병기, 이호근이가 다녔고, 진월면에서 박수묵, 공재열, 김정국, 김종규, 김창욱, 김현국이가 통학을 했다. 그 중에서 서대식이와 정학원이는 다압면에서 먼 길을 마라톤으로 통학을 하였는데 그들이 지각을 하거나 결석을 하는 것을 한 번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동중학교 최고의 단거리선수인 정학원이를 큰 고라니, 최고의 마라톤선수인 서대식을 작은 고라니라 불렀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정회경이는 우리 반의 반장을 했다. 이상구도 중학교에는 함께 들어갔다. 나는 천연두를 심하게 앓고 얼굴에 해방곰보라는 낙인이 찍혀 항상 친구들 앞에 떳떳이 나설 수 없는 열등감 때문에 한때는 스스로 소외되어 우울하거나 감정적이며 비교적 소심하고 배타적이었다.
  그러던 나는 기계체조와 보디빌딩을 하던 이범규 선배와 태권도를 하던 전양의 큰 형님인 전철씨와 권투를 잘하는 김경사(경찰관) 세분이 모여, 주인 없이 비워져 마치 유령의 집으로 여겨왔던 일본 적산가옥(담포집)에 체육관을 열고 권투와 태권도 역도 기계체조 등을 가르치고 있을 때, 이범규 선배와 보디빌딩을 하던 서대식이가 권투를 함께 해보자고 하였다. 이선배와 김경사는 핸디캡(열등의식)이 있는 사람일수록 힘과 지혜를 겸비해야 하는 격투기를 배우면 정신통일 잘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관원으로 들어오라고 하기에, 서대식이와 함께 제일먼저 체육관 권투부에 지원하여 상당한 기초를 닦았을 때 자신이 생겨났고, 그 뒤에 이상구, 이광남, 이 홍충, 진용주도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진주, 광양, 구례, 광주 등지에서도 이러한 체육관이 많이 생겨나 지역별로 친선대회가 종종 있었다. 권투시합이 있을 때면 마라톤을 잘하는 서대식의 리드로 나와 상구는 새벽마다 츄리닝을 입고 횡천 남산다리 소나무까지 뛰어 가서, 읍으로 들어오는 첫 통학버스가 시간을 맞추듯 다리 위에서 만나, 그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등교를 했던 기억이 난다.
  청암, 횡천, 적량에서 통학을 하는 친구들을 버스에서 자주 만나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우리가 속도를 내어 빨리 뛰었을 때는 적량을 지나올 때 우리를 보고 운전기사 아저씨가 차를 세워주시기도 했었다.

  회경이는 가끔 나에게 구용이 네가 권투를 시작하고 난 뒤부터 달리기도 잘하고 지구력도 생겨 무슨 일이든 자신이 있어 보이고, 명랑해 보인다며 칭찬을 해줄 때가 있었다. 올바른 운동은 체력과 건강을 지키고 의지력을 길러 자신감을 가지게 한다는 것을 알았는지 회경이도 권투를 해보겠다고 체육관에 나온 적이 있었다.

  중학교 다닐 때 동리 친구들 중에도 자주 만나 놀던 곳이 정 광호 집 뒤뜰 석류나무 밑에 있는 탁구장이거나 정회경이 집 감나무 밑이었다. 탁구를 칠 때면 왼손잡이 김광석이가 제일 잘 쳤다. 광석이를 이기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회경이, 광호와 나는 돌아가면서 광석이 연습상대 밖에 되지 않았고, 광석이가 너무 오래하다 미안하면 자리를 물려주기도 했었다. 그 당시에도 우리 동네에서 무슨 놀이든 김광석이가 대장노릇을 한 기억이 상당히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