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心傳心

 

웅암 이진원

 

   여명이 밝아오는 아침의 공기는 상쾌하다. 신(자연)이 내려준 건강한 세상은 아무나 느끼지 못한다. 오늘은 키를 넘긴 띠풀숲(억새)을 밑둥부터 잘라 눕히지 않았다. 성정이 급한 나는 매사를 빨리 끝내버리려고 무작정 서두르는 버릇이 있다. 그런 나도 이제는 생각하며 조심하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고희란 이름이 어른을 지칭하는 것인가 보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여든까지 간단다.

  작년에 이곳에서 풀숲을 베는데, 바람소리를 휘돌리는 예초기 칼날 바로 앞에서 맑은 눈망울로 나를 처다보는 밤색깔의 쬐끄마한 노루 새끼가 기어 나왔다. 아차 했으면 이놈이 다쳤을 것이다. 소름이 오싹하고 머리가 꼿꼿이 섰다. 다급하게 기계를 세웠다. 동화 속의 봄비처럼 까많게 맑은 두 눈이 작은 코위에 안경처럼 붙어있었다. 손바닥에 올려 놓고 싶을 정도로 작았다.

  이놈이 겁도 없이 기어나와 나의 구두 앞을 서성인다. 크다란 안전화 구두색깔을 제 에미로 아는 것 같다. 나는 장승처럼 가만히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눈이 '엄마가 여기 가만히 있어라고 했어요!'하고 말 하는 것 같았다. '야야 손대지 말고 가만히 두어라!' 문득 아버지의 말씀이 들리는 듯 했다. 수북하게 베어눕힌 풀더미 속으로 살금살금 기어 들어간다.

   생전에 아버지는 나와 함께 이곳 선산 벌초를 했었다. 그 때 예쁜 노루새끼가 풀 숲에 숨어있는 것을 잡으려고 했다. 아버지가 잡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노루새끼를 걱정했다. 아버지는 사람이 잡을까 걱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에미가 꼭 데려 간다고 하셨다. 그 때의 환청이었다.

  오늘은 그 일이 생각나, 키를 넘긴 띠풀숲 윗둥부터 잘라 내고, 아래를 살펴가며 조심스럽게 예초기를 돌렸다. 돌도 나무도 피해가며 풀을 자르니 칼날이 무디지 않는다. 칼 날 다섯개가 모자랄 정도로 위험하게 일을 했던 지난날을 상기했다. 오늘은 칼날 두 개로 제각 선산과 납골당 작업을 모두 일찍 마쳤다.

   오후 4시가 다 되어 간다. 제각 죽담에 앉아 땀을 씻으면서, 그 노루 새끼는 잘자라고 있을까? 하고 가엾은 모습을 떠올렸다. 바로 그때 제각의 뒷산에서 '컹컹 컹컹'하는 우렁찬 노루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때 맞춰 그 놈이 나를 찾아와 인사를 하는 것 같다.
천도경전에 내 마음 보내는 곳에 모두가 살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