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로스와 나

이 진 원  


처음 타는 실습선

  

  경남도청에서 동삼동 해양대학서무과로 전직 한지가 벌써 반년이 넘도록 보직도 없이 대기자로 허송세월만 한 것이다. 매사에 앞장서서 어려운 일을 처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에게 엄청난 고역이었다. “안일하게 무책임한 일만 골라하는 것은 무위도식하는 것이지 참 일꾼의 자세가 아니다”라고 다섯째 자형을 꾸짖던 아버지의 말씀이 신통하고 실감나게 느껴진 것이다. 보직 없는 월급을 받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다.

  그러던 중 해양대학부설 제6기 을종해기사국비생모집업무를 맞게 되었다. 나는 교무과장을 찾아가 해기사가 되기를 원했다. 당시 교무과장 김용성 교수와 손태현 학장은 모두가 배를 내려 육상근무하기를 원하는데 이 선생은 반대로 배를 타러한다면서 일단 20:1의 응시율을 통과 합격한 후 진로를 논의 하자고 하여 절반의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1967년 2월경이다. 노아가 돌이지나 아장 아장 걸을 때다. 내가 학교직원으로 근무했고 성적우수 수료생으로 실습허락을 받은 4명중에 들게 된 것도 해양대학의 배려라며 엄한 기숙생활의 전수과를 힘들게 수료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설 명절을 앞두고 승선을 하라는 것이다. 물론 하루라도 빨리 실습을 마쳐야 면허를 받아 정식 해기사로 승선할 수가 있다. 그러나 설 단대목에 출국을 하는 것도 서러운데 실습기간 1년의 두 배인 2년 승선계약을 지켜야한단다. 국적선이 적은 우리나라에서 실습승선을 허락하는 선주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노동력을 착취하는 이 같은 외국선사에도 서로 가겠다고 경쟁을 하는 판국이니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도 못되었다.


  훗날 이러한 외국선사의 횡포를 빗대어 신판 노예선이라 했고 이런 선사의 Agent를 맡은 한국선사를 노예사냥꾼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노예선원대리점으로 치부를 하면서 고용에 대한 의무와 책임은 철저하게 배제한 선박회사가 참 많았다. 한말의 사대주의 친일군단처럼. 


  영도 동삼동에서 해양대학전수과 입소 전에 하동 부모님 집으로 이사를 하였기에 승선하는데 시간을 지체할 이유도 없었다. 승선 통지를 받기 전에는 실습승선이 늦어질까 걱정도 했었다. 노부모님을 모시고 무위도식 하는 것 같았고,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올 때처럼 천방지축 일을 찾아 나설 수도 없었다. 처음 동아인쇄소 사장님이 어려운 나를 도와주시며 믿고 일을 맡겨주셨을 때 경남도청에 부임발령이 났다. 떠나야 할 처지를 이해 하시면서도 가지 않기를 바라셨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해양대학에 들러 수첩을 받아들고 불안한 마음으로 부산 제2부두로 혼자 갔다. 당시만 해도 아무나 부두에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부두관문을 들어서며 수첩과 노란 검역증을 제시하고 선창으로 나가보았다. 선원수첩에 기재된 직책은 3기사, 승선이유는 실습이었다. 선명은 S.S. BROTHERS′S 총톤수8,000톤 기관은 삼연식 증기기관(triple steam ship) 국적과 선적항은 PANAMA인 편의치적선이다.

  

  난생 처음으로 선원수첩을 들고 좌우에 붙어 있는 높은 사다리(gangway)를 타고 배에 올랐다. 사변 후 하동포구에서 소와 목재를 싣고 부산을 오가던 발동기선(10-20여톤)도 상당히 큰 배로 생각했던 나는 엄청나게 큰 이 배라고 여겼다. 해병신병훈련당시 미해군 APA라는 수송선에서 완전무장상태로 좌우선체에 늘어뜨린 하선 망을 기어오르고 내리는 훈련을 했었다. 그 때 배가 너무 크고 높아 배가고파 지쳐 떨어지는 병사가 두 사람이나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이배는 그때보다 더 큰 것 같다.

  출항시간이 다되어서야 도착한 나를 연세가 많은 사무장(통신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2층 3등기관사 방으로 안내 하였다. 작업복과 안전화로 복장을 바꾸고 기관장과 선장에게 승선신고를 하라는 것이다. 다시 해군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기관장 방 앞쪽 통로 옆에 붉은 글씨로 기관실이라 쓴 작은 문을 열고 기관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뜨거운 열기가 코와 입으로 들어오면서 숨이 확 막힐 지경이었다. 눈앞이 가물가물하며 현기증이 이러나 계단 나간(hand rail)을 덥석 잡았다. 놀랄 정도로 뜨거웠다. 엉겁결에 손을 놓고 주머니에 든 면장갑을 다시 끼고 천천히 계단을 따라 사람이 보일 때 까지 내려가 보았다. 처음이라 10층이 넘는 계단을 내려온 것 같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았는데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버렸다. 연신 옷소매로 땀을 닦으면 조종실에 내려와 실습생이라고 하며 인사를 했다. 기관장과 1등 기관사를 비롯한 기관부원이 모두 기관실 구석구석에 배치되어 있었다. 기관장과 일기사가 나를 데리고 기관실 구석구석을 돌며 각종기관과 역할을 설명해 주었다.


  조종실로 돌아오자마자 귀가 아플 정도로 땡땡 그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일기사가 너더러 너는 입출항 때는 항상 나의 곁에서 Telegraph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바로 그 종소리는 standby engine 신호였다. 1기사가 기관장에게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한다. 기관장은

“받아줘! 한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멍청하게 있었다. 일기사가 나에게

“너 뭐해 너!” 하고 말한다.

“예?…”

“신호를 받으란 말이다!”

그래도 우물쭈물 하는 나를 보고 조기장이 이래저래 설명을 해준다.

“telegraph핸들을 당겨 바늘 끝을 맞추어 놓았다”

시끄럽던 종소리가 멎었다. 1기사는 또 지시를 한다.

LOG BOOK에 시간을 써!

“…”

  머뭇거리며 이해를 못하는 나에게 출입항 때 3기사가 해야 할 일을 대략설명해주며 앞으로 기관항해일지 보조기록은 날더러 쓰라고 했다. 출항 며칠 전에만 승선을 했어도 이렇게 난감하고 안절부절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습이라는 이로구나! 하고 억울하거나 원망스럽지 않았다. 이 판국에 잘못한다고 하선을 시킬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은 다 그래요!” 하며 위로해주는 젊은 조기장이 내가오기 전까지 3기사의 일을 대신 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다른 사람을 태우려고 했다가 설 앞이라 펑크를 내자 급하게 출항 직전에 나를 승선시킨 것이라 했다. 해양대학의 배려라고 말했던 연습과장의 미소가 가소롭게 느껴졌다. 예나 지금이나 교수와 선생은 선의의 거짓말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쉰 목소리 같은 탁하고 무거운 기적소리가 길게 두 번 울린다. 하늘에서 빗물방울이 내 코에 두 방울 떨어진다. 기적steam drain이다. 종소리가 요란하게 우리면서 “stop engine" 신호가 왔다. engine사용도 하지 않았는데 이상했다. 1기사가 난방에게 보일러 압력을 잘 유지하라 이른다. 조금 있으니 “Full Astern"의 맨 아래 붉은 글씨에 바늘이 내려가며 종소리가 난다. 나도 놀란 듯 후닥닥 받았다. 야무지게 생긴 1기사는 예리한 눈빛을 반짝이며 서둘지 말고 정확하게 받아라! 하면서 Steam throttle valve를 여유 있고 힘차게 열어 내린다.


  지금까지 조용하게 새는 증기 소리와 콘덴사의 cascade tank 물소리만 들리든 기관실이 심한 진동을 일으키며 육중하고 거대한 크랭크가 기름을 튀기며 사정없이 돌아간다. 몇 초가 안 되어 종소리가 나며 Half astern 신호가 온다. 종소리가 멎고 조금 부드럽게 도는 듯 했는데 "Stop engine" 신호가 내려왔다. 보이러실 앞에서는 버너를 교환하느라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리며 분주하다. 부드러운 기적소리가 길게 두 번 울리드니 "Ahead slow"신호가 온다. 연이어 half, full 신호가 내려오고, 반시간이 지나자 종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면서 telegraph가 상하를 두세 번 움직이다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1기사가 “Rang up"과 시간을 쓰라고 한다. 메아리같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기적소리를 오륙도를 향해 손짓하듯 길게 보내주면서 나는 부산을 떠났다.     

 

  행해 중 기관장이 심심풀이익살로 설명한 라스코 해운의 역사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군수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어 졌다가 일본이 원자탄을 맞고 무조건 항복을 해버리는 바람에 취항을 못해보고 타코마 조선소에서 폐기되어가는 두 척의 배를 고철로 사들여 고철운반선박으로 개조하여 고철을 싣고 고철선박과 함께 팔아먹으려했다가, 엄청나게 지불한 보험료의 본전을 찾고, 비싼 운송료수입에 짭짤한 맛을 들인 고물장사가, 낡은 구형선박에 목숨을 걸고라도 배를 타겠다는 한국선원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LASCO라는 해운회사를 등록했다고 했다.


 그 당시 두 척의 고물선이 SAMUEL′S 와 BROTHERS′S다. 제2차대전시 LIBERTY라 불렸던 수송선인데, 내가 탄 배는 그중 S/S BROTHERS′S호였다. 엄청난 해상보험금을 탈 수 있기에, 해난사고가 일어나 침몰해도 걱정이 없다던 백인선주를 위해 법정선원대치용으로 월급도 없는 실습생으로 부득이 고철을 실어 나르기 위해 고철 같은 이 배를 탈 수밖에 없었던 슬픈 환경이었다.


  나를 고용한 선주는 유대계 미국인 “스니쯔”라고 했는데 선명의 끝에 붙인′S자가 그의 이름자라고 했다. 원래는 미국 PORTLAND에 있는 CASCADE steel CO.이다. 한국의 협성선박은 LASCO SHIPPING CO.의 이름으로 송출선사 대리점을 설치하여 우리의 고용계약사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라스코해운회사’로 알고 있었다. 

 자유를 사랑한다는 백인인 미국시민이 이토록 야비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같은 민족의 선장과 기관장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노예사냥꾼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생각을 지금도 떨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