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동학과 지금의 천도교

 

웅보 이진원     

 

 

1. 그리운 부모님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동학이나 천도교 포덕에 대한 한 마디의 말씀도 들어보지 못했다. 동학에 대하여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경이면 조용하고 부드럽게 들리는 알 수 없는 암송을 가끔 들었을 뿐이다. 아마도 삼칠자 주문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모든 것이 신비하고 아름답게만 보여진 것은 부모님의 말씀은 매사가 한치도 어김없는 이루어 지는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철없는 행동으로 저지른 모든 일을 도무지 숨기거나 변명을 할 수 없었다. 순간의 모면을 해 본들 조용하신 아버지의 모습은 부처님의 손바닥위의 자신을 느끼게 하셨다. 그러나 어른이 될 때까지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들어 본 일이 한번도 없었다. 다만 가끔 남의 잘못으로 인한 억울한 매를 어머님으로부터 맞는 것은 인고를 수련하라는 모성이었다.  잘못을 알면서 묵인 하는 우정은 친구를 망치게하는 악한 의도와 같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옳지 못한 일이나,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일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 용기는 만용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잘 못 이해하여 급한 성미로 실 수를 하면서도, 부모님의 말씀은 한 번도 거역하지 않았다.  참으로 거역할 일이 한 번도 생기기 않도록 배려 하여주신 것이다. 거역이란 일방적 지시나 명령을 어기거나 변명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은 언제나 나에게 의견을 물어 내가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해주셨고 나의 어떠한 결정도 인정해 주셨다. 언제나 자의적 결정으로 약속을 지켜 신뢰를 쌓도록 해주셨다. 모든 일을 반드시 해야 할 책임이나 의무로 인식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유도 해 주셨다.

  부모님도 약속을 어김없이 이루시며 올은 일은 언제나 한울이 돕는다고 하셨다. 나는 부모님의 전능하신 모습을 닮고 싶었고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싶었다. 또한 변명이나 비굴한 말씀은 부모님으로부터 한 번도 들어 본 기억이 없다. 내가 지금도 변명과 비굴한 말로 남을 현혹하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모습을 좀처럼 보지 못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입버릇이 된 거짓변명을 저주할 정도로 싫어한다. 아무리 외롭고 힘들어도 처자식들에게도 이를 너그럽게 용서하지 못한다.

  지금도 나는 동학을 믿는 사람은 부모님과 같아야 하고 내 스스로도 부모님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남보다 앞서 노력하고 예지로서 미래를 위해 공동의무를 실천하며 전능한 삶을 살아가는 진리가 동학이다. 부모님께서 매사를 실천하셨던 모습처럼 동학은 세상을 개벽하여 지상천국을 만들수 있는 믿음이라는 감응을 내마음에 남겨주셨다.  

  고희가 되도록 나는 매사에 변명이나 책임회피를 해보지 않았다. 이것은 인고를 자초한 수련과정과 다를 바가 없다.  20년동안 해상생활의 관리자로 부하나 동료들에게 일방적 명령이나 지시를 해 본 일은 없었다. 항상 사전협의결정한 약속을 계획적으로 이행했을 뿐이다. 공동의무를 어길때의 혹독한 책임을 지는 것은 모두의 생명을 위하는 일이다.  뭍으로 돌아온 나는 가장의 입장에서도 식구들에게 일방적 주장을 해 본 기억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처자식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가장의 궁극적 의무는 가족의 행복추구와 그 유지다. 이러한 가장의 선결의무이행이 그들의 책임회피와 변명수단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잘못된 습성이 길들여진 것도 가장의 책임이 될 수밖에 없다. 부모님의 실천모습으로 가정을 이끌지 못한 책임이 그것이다. 또한 가족은 변명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가장은 그들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이 도량과 능력이 있는 것으로 잘 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울님이 지상천국을 만들어 주어야 교인이 도를 지키게 된다는 지금의 일부 천도교인들과 다를 것이 없다. 가정도 지상천국도 한울님과 인간이 통하여 동귀일체가 이루어질 때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앎을 찾는 것이고 실천했을 때 앎을 얻는 것이다. 천도교 게시판에 나타난 사실들! 추악한 죄를 짓고서도 조금도 반성을 못하는 천도교인을 만들어 낸 사람들은 바로 만년 기득권의 교직자와 이들의 추종자들이다. 이들이 변명과 책임회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다녔던 교구가 그렇다. 나와 같은 사람이 생길까 두려워 교회도 가지 못하고, 이 글을 쓰게된 동기도 된다.

 누구나 인생의 말년은 배반적 배려를 감수 할 수밖에 없는 무능한 신이되게 마련이다. 이것은 신의 약속을 스스로 파기한 업보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스스로 만든 죄와 벌의 귀결이기도 하다. 효제충서란 사람이 한울님에게 실천할 것을 약속한 것이고, 이 약속을 지킬때 한울님의 보답으로 지상천국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약속을 지킨자에게만 종생의 안락을 누리도록 한울님이 보은하는 것이다. 부모님을 한울처럼 섬기는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줄 때 만이 노년의 배반은 당하지 않는다.

  부패한 공룡행정제국의 개혁은 동학혁명정신의 현대적 부흥만이 가능한 방편이라고 믿었다. 한울님의 감응 하심으로 2005. 11. 11. 11:00 (포덕 146년) 도암을 만나 무리진 안개속의 동학군 위령제(하동 옥종 부방)를 처음 보게 되었다. 꿈에서나 보았던 부모님의 신비한 동학을 가슴 부풀게 실감했다. 사라진 전설, 신비한 민족개혁의 얼이 살아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못견디게 시달린 억울한 삶도 존중받을 때가 있을 것이란 가능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조국이 지구상에서 지상천국이 될 수 있는 유일한 根坤임을 암시 해 준 날이기도 했다.

  포덕 147년(2006) 1월 8일 천도교 입도식을 했다. 도암으로부터 『천도교경전』과 21염주와 천도교 신앙 안내서를 선물 받고 진주교구 시일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도암의 권고로 이 해 8월1일부터 일주일간 용담수련원에서 수련경험도 해 보았다. 그 후 아침저녁으로 청수를 봉전하고 기도를 드리며 경전을 읽었다. 지금까지 경전을 겨우21번 읽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중요한 천덕송을 숙지 하기가 어렵다. 천도교가 쇠락 하는 이유중의 하나이다. 포덕148년 3월에 방송대국문학과에 편입하여「동서양고전」이란 철학과목을 다시 학습하게 되었다.  

  천도경전을 읽은 지금, 예전에 미쳐 느끼지 못했던 학과목으로 어필되어 나를 심취하게 만들어 버렸다. 『천도교』의 모든 종지가 이들 철학자들이 주장한 진리를 전율을 느낄 정도로 빠짐없이 한울님의 권능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고전철학과 문학은 물론, 동양과 서양의 철학사상까지도 모두 수용하고 있음에 감탄하였고 대신사님의 영적을 위대하게 느꼈다. 경전을 바로 깨닫지 못한 동덕이 있다면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기를 지극히 비는 마음으로 이들의 철학사상과 이념의 요지만 열거해 본다.

  일부 도동덕의 지탄을 받을 수 있는 어슬픈 비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인의 종교를 수용하겠다는 천도교의 이념에 부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기독교의 '세레요한이 후발의 예수를 세레로 영접하는 형국'과 비교해보면 오히려 이보다 더 위대한 대신사님의 영적과 동경대전의 탄생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시대와 먼 세월을 일각으로 묶어버린 말씀이『천도교경전』에 있기 때문이다.

 

2.『천도교경전』과  동·서양 철학관

  동경대전은 문학적 가치로도 더 할 수 없는 신뢰를 갖는다. 왜야 하면 우리의 고전 금오신화를 비롯한 모든 한국의 고전문학은 물론 역대 중국 문호들의 고전문학도 한꺼번에 녹아 있다는 사실이다. 용담유사와 같은 한말의 가사가 지금도 우리의 입에서 노래불려지고 있지 않은가! 대신사님께서 방물행상으로 방황하신 시련은 석가, 예수, 공자, 마호메트 보다 더 한 것이었다.

 용담으로 돌아와 득도 하실때 까지 이러한 철학과 문학을 학습하지시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만세의 철학을 자연섭리로 본 듯이 한울님의 감응하심에 의하여 창도주가 직접 기록하여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남기신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 어떠한 경전도『천도교경전』을 따를 수는 없다. 왜야 하면 다른 모든 경전은 구전되어온 이야기들을 본인이 아닌 후대들이 종교체험으로 남긴 기록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슬픈 것은 지금의 천도교인들이 경전의 진가와 그 의미를 멋대로 도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장사치의 근성으로 책임회피나 변명수단으로 악용하고 있으니 대신사의 순교가 얼마나 통절하고 서럽겠는가! 불쌍한 마음과 죄스러운 마음이 앞설 뿐이다. 용담정의 일주일을 가슴메이도록 눈물만 흘리고 돌아 왔었다. 욕심과 아집에 가득한 교도들의 불쌍한 모습이 선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 같았다.

2.1 한국사상

  1)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의 「종체(宗體)를 나타냄」에서
       '대개 대승의 본체는 고요하여 적막하며, 깊어서 그윽하다. 깊고 깊으나 어찌 만상의 밖을 벗어나겠으며, 고요하고 또 고요하지만 오히려 백가(百家)의 말 속에 들어있다. 만상의 밖을 벗어나지 않았으나 오안(五眼 ; 모든 법의 事·理를 관조하는 다섯 가지 눈. 곧 肉眼, 天眼, 法眼, 慧眼, 佛眼)으로 그 몸을 볼 수 없고 말 속에 있으나 사변(四辯)으로 그 모습을 말할 수 없다. 크다고 하고자 하니 안이 없는 것에 들어가도 남김이 없고 작다고 말하고자 하니 밖이 없는 것을 감싸고도 남음이 있다.' 와 같이 원효의 종체 즉 천도교의 종지라고 할 수 있는 심법을 표현 한 요지다. 열면 무량무변의 뜻을 근본으로 하고 합치면 일심을 핵심으로 한다. 모든 것이 마음의 작난이라는 것을 크게 깨달은 것은 천도교 사상의 수심정기와 다를게 없다.

  2) 일연의『삼국유사』는
      몽골의 30여 년에 걸친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굴복한 시기에 저술 된 역사책이다. 그러므로 민족의 위기를 맞아 구국의 정신을 고취했던 정신사관을 보여준 것은 패망직전의 한말에 구국을 위한 대신사님의 동경대전의 저술과 이념과 다르지 않다고 여겨졌다.
  서문에서  '이세상 어느곳이 진향(眞鄕)아니랴마는 향화(香火)의 인연은 우리 나라가 으뜸이라. 아육왕이 손대지 못할 일이 아니라 월성(月城)옛터를 찾아온 것이로다.'라고 한 말은 마치 용담으로 돌아오신 대신사님의 이야기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3) 정도전의 『삼봉집』권9. 경제문감 재상지직(宰相之職)에서
     위로는 음양(陰陽)을 조화롭게 하고 아래로는 서민을 편안하게 하며, 안으로는 백성을 밝게 다스리고 밖으로는 오랑캐를 진정하고 무마하는 것이니 국가의 포상과 형벌이 여기에 관련되며 천하의 정치와 명령이 여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경전의 바른 덕치를 그대로 표방한 듯 하나 동경대전보다 수세기를 앞당겨진 글이다. 경전의 예와 오늘이 다르지 않다고 하신 말씀이 아닌가.

   4) 이황의『성학십도』와 이이의『성학집요』
        성학십도의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에서
       ' 理와 氣를 겸하고 性과 情을 포함한 것이 마음이다.  성이 발현해서 정이 될 때가 곧 마음의 기미(幾微)인데, 이는 온갖 변화의 중심이며 선악의 분기점이다. 敬의 태도를 유지하는데 전념하여 天理와 人欲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몸소 주의 해야 한다. 마음의 존양과 발동의 성찰 습관 등'의 심법은 동학의 심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성학집요의 修己편의 窮理장에서는
       ' 理氣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고 할 수 있다. 理와 氣는 혼연일체로 처음부터 분리할 수 없으므로 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비록 분리할 수 없다 하더라도 혼연한 가운데 뒤섞이지 않아 한가지라고 할 수도 없다. 이는 형체가 없지만 기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고 한 것은 바로 천도경의 이기와 다를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5) 허준의『동의보감』「내경편」'신형정부도: 허준의 인간론' 에서
     ' 하늘에 일월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안목이 있다. 하늘에 주야가 있으며 사람에게 오매(寤寐)가 있다. 하늘에 뇌전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회로가 있고 하늘에 우로가 있으면 사람에게는 눈물이 있다. 하늘에 음양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한열이 있고 땅에는 천수(泉水)가 있으며 사람에게는 혈맥이 있고 땅에 초목과 금석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모발과 치아가 있으니 이러한 것은 四大, 五常이 묘하고 아름답게 조화되어 성립된 것이다.' 란 표현은 시천주를 극명하게 증명하는 동경대전의 포덕진수와 통한다.

  6) 정약용의『목민심서』4편 「애민」에서 '천하에 가장 친해서 의지할 데 없는 것도 소민이요, 천하에 가장 높아서 산과 같은 것도 소민이다' 란 비유는 귀천을 가릴 수 없는 인내천의 가접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왕이 백성의 녹으로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경전의 도리를 면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7) 최한기의 『기측체의』서문에서
       神氣는 실제적 이치의 바탕이요 추측은 지시을 넓히는 요법이다. 그러므로 이 기에 연유하지 아니하면 탐구하는 것이 모두 허망하고 괴탄한 이치이고, 추측에 말미암지 아니하면 안다는 것이 모두 근거가 없고 확인할 수 없는 말일 뿐이다.
      천지를 알 수 없으면 기를 알 수 있는 자는 없다. 기를 알 수 없으면 이를 알 수 있는 자는 없다. 기를 알 수 없으면서 이를 알 수 있는 자가 있었단 말은 결코 들어 보지 못했다. 이렇게 최한기는 우주 만물이 기로 이우어졌고 인간도 그 가운데 한 존재인데, 인간은 신기를 가지고 있어 이것을 통하여 우주와 교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신기는 전통적으로 마음이라는 개념이라 했다.  천도교이기설을 그대로 통하고 있다.

 

2.2 동양사상

  1)『주역』은 동경대전의 발생 연원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신사께서 영부를 받을 때의 게시가 주역의 관통이라는 믿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물론 경전에 주역의 원천을 대신사께서 말씀 하셨다.
   '역경'의 본문에 "역에는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兩儀를 낳고 양의가 四象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았다"고 밝힌다. 여기서 태극이란 우주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본체로서, 천지가 아직 분화되기 이전의 혼돈 상태를 지칭한다. 이 태극이 분화되어 음과 양이 되니 이것을 양의라고 한다. 단지 상징적으로 볼 때, 천지가 음양이고 더위와 추위가 음양이며 밤과 낮이 음양이고 생사가 음양이며 남녀가 음양이라고 한다. 이는 우주 만물의 구성을 개념적으로 구분한 것이며 양의를 교차하여 太陽·少陰·少陽·太陰의 넷으로 변화하니 이를 四象이라고 하며 서로 바뀌는 원리를 나타낸다. 

  2) 공자의 『논어』의 학이편에서
     지헤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사람은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나 어진 사람은 조용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워하고 어진 사람은 천수를 누린다. 는 명제들은 사실상 천도교의 실천궁행의 요점이 된다. 그러나 앉은뱅이 산직이 같이 10조를 뒤집어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 천도교의 현실이다.

  3) 노자의 『도덕경』에서
    도는 無이면서도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으미를 함축한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훌륭하게 이롭게 하면서도 투쟁하지 않는다. 는 천도교의 근본을 천명하는 듯 하다. 천도교의 도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창조적 힘으로서의 자연은 자발적 힘이다. 그러므로 도는 "생산하되 소유하지 않으며 활동하되 자랑하지 않고 성장하게 하되 지배하지 않는다."이러한 자연적이고 능산적인 힘, 즉 도의 창조적 능력을 '현묘한 덕'이라고 한다. 이것은 경전의 포덕문을 총칭한 무위이화를 극명하게 표현 하는 뜻이라 생각된다.

  4) 사마천의 『사기』에서
   요즘에도 법도에 어긋난 행동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만 골라서 하면서도 일생을 편안히 살 뿐아니라 그 부귀를 대대로 계속 누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땅을 가려서 밟고 때가 되어야 말을 하며 사잇길을 가지 않고 공정한 일이 아니면 발분하지 않으나 재앙을 만나는 사람이 이루 혜아릴 수 없이 많다. 나는 심히 당혹을 금치 못하겠다. 도대체 이른바 천도라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이가?
   논학문에서 대신사님께서도 대답을 해 주시지 않았던 말씀이다. 존경하되 멀리 하라는 말씀이셨지만 이런 사람이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알 수가 없다고 하셨다. 바로 지금의 천도교인이 저지르고 있는 과오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한울을 무서워 하지 않는 까닭이며 재앙을 부르는 종말의 초혼이다.

  5) 왕수인의 『전습록』에서
     "마음이 곧 이치니 천하에, 마음밖에 일이 있을 수 있겠으며 마음밖에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지행합일론은 마음의 움직임이 곧 理의 구현이라는 생각에서 나왔다. 그래서 앎이란 실천의 시작이며 실천이란 앎의 완성리고 했다. 바로 천도교인 들이 실천궁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한울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진실과 상통한다.

 

2.3 서양사상

  1) 플라톤의 『국가』에서
      올바르고 완전하게 선한 국가는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정의의 덕을 가진다. 플라톤은 정의로운 국가와 정의로운 개인이 모두 같은 덕을 근본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정의'는 각각의 계급이 자신의 직분을 완수하고 자기의 것 이상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다른 덕을 성립시키는 가장 중요한 덕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인간은 자족적이지 않고 많은 것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모자란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국가가 건설된다. 라고 한 것은 의암 성사법설의 바른 국민과 바른 국가론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2) 아르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윤리학』의 제2권에서
     '사람이 선하게 되는 길은 오직 하나로되, 악하게 되는 길은 여럿이니라!'로 말했다. 경전의 성범설을 어찌 이토록 간략하게 포현한 것일까 싶다. 지금의 천도교인은 오직 악하게 되는 길을 찾아 다니면서도 스스로 한울님을 모신 주체이기 때문에 죄가 되지 않는 다고 믿으니 천도교가 어떻게 지상 천국을 건설 하겠는가!

  3)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에서
     '하나님의 날은 되풀이되지 않고 언제나 오늘이고, 하나님의 '오늘'은 영원입니다.'라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은 우리경전의 부질없는 과거나 미래를 들먹여 영원한 오늘을 헛되이하는 것은 나무위에서 고기를 찾는 형국이란 성사님의 법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지난일을 그리워 하는 지금의 천도교가 현제와 미래의 시간만이 존재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되새겨 봐야 한다. 현재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과거와 미래를 변명의 수단으로 악용해서는 안 된다.

   4) 데카르트의『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는 4가지 격률을 제시했다. (1) 가장 온건한 의견에 따르는 것, (2) 일단 결단한 것은 최후까지 견지하는 것, (3) 자신의 역량의 범위 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4) 천직을 정하는 것이다. 지금의 천도교가 거두절미하여 도식하고 있는 오류의『사계명』을 비교하면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의미다.우리가 이처럼 사계명을 앵무새 처럼 외우기만 하면 죄를 면하는 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줄 모른다. 쉽게 계명이라 이름붙여 주절 대서는 안 된다. 도덕가 전채를 읽고 진정한 실천을 감행해야 한다.

  5) 로크의 『정부론』
    '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고, 각자 모두 자연법의 집행권을 포기하여 그것을 공동체에게 양도하는 곳에서만 비로소 정치 사회 또는 시민 사회가 존재하게 된다.' 는 롴의 정부론은 성사님의 명리전을 압축해놓은 말과 같다. 법과 종교가 일치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현실에 도가 있음을 인정하는 천도교의 지향 때문이다. 지상천국을 만들 수 있는 이념을 현실에 둔 것이지 공상의 변명과 회피속에 둔 것이 아니다.

  6)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법이란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물의 성질로부터 발생하는 필연적인 관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든 존재는 그의 법을 가진다. 신도 그의 법을 가진다. 물질계도 그의 법을 가진다. 인간보다 우수한 지성적 존재도 그의 법을 가진다. 짐승도 그의 법을 가진다. 인간도 그의 법을 가진다. 신은 창조자로서 우주와관계한다.' 천도교의 삼경을 보는 듯 하지 않는가! 날짐승 풀 한포기도 시천주의 관계가 있다는 행월신사의 법설은 이들의 훌륭한 철학과 같은 것이다.

  7) 루소의『에밀』에서
      신은 나에게 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양심을, 선을 알기 위해서는 이성을, 선을 택하기 위해서는 자유를 주시지 않았던가? 룻소는 종교를 인간 본연 감성의 자연스러운 발로라고 본다. 그는 성경도 많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예수는 신이나 신의 아들이 아니라 본 받아야 할 완벽한 인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천도교가 지향하는 성심설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말이다. 대신사님은 진정한 한울님의 도를 펴시어 한민족 이강토에 지상천국을 건설 하도록 보내주신 본 받아야 할 완벽한 인간이신 것이다.

  모든 학설의 주장은 끝없이 펼쳐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공부하면 할 수록 천도교 경전의 울타리를 벗어 날 수 없음을 발견한다. 다만 경전의 진리를 한가지도 제대로 실천을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아집적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속으로 전이해야 할 천도교를 인식 못하는 때문이다. 천도교는 통째로 뒤집어 없애고 새로운 싹부터 시작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패다임 전환이다. 쿤의 철학관념이 진실로 천도교에  도입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