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행복
<파 탄(3)>

웅암 이진원

   

1

   디지털 시대가 찬란했던 아나로그의 자연현상을 근사치 2진수로 바꾸어 버렸다. 원숭이 두뇌보다 못한 컴퓨터의 2진법 수, 단순 해서 정직하게 보일 지 모르지만 사실상 중용이 없는 흑백논리가 아닌가. 음향 광학 기기와 영상 사진의 필름매체가 하루 아침에 바코드의 늪속으로 갈아앉아 버렸다.
   집주인은 밀린 점포월세를 독촉하며, 임차료를 올려 재계약하거나, 아니면 두 개로 나누어 놓은 점포를 원상복원하고, 새 계약자에게 점포를 넘겨달라는 성화에 견디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며 알몸으로 늪을 빠져나오듯 모든 기자재를 송두리채 고물상을 불러 가져가게 하고, 점포보증금1400만이라도 온전히 건져내려고 약속 날짜를 지켜주었다.

  이것이 나의 직업생활 은퇴였고, 가장(家長)의 은퇴였으며, 67세의 무기력한 노년의 시작이었다. 그나마 건져낸 마지막 퇴직금이라도 마음 대로 쓸수 있을 줄 알았으나, 아내의 손에 넘겨지는 순간 사라저 버린 돈이었다. 그 중에서 200만원으로 콘테이너를 구입하여 10년을 싸워 남강에서 건져올린 나의 땅에 휴식처를 만들어 세금을 낸 과표대로 땅값을 제대로 받을 때까지 땅을 지키며 싸우고 싶었다.
  그러나 진주시의 공권력 남용은 이 순간의 용기마도져 짓밟아 버렸다. 대법원의 판결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행정심판, 행정소송, 민사재판, 형사재판도 행정폭력의 대변자였다.

  법이란 절차를 무시한 행정폭력, 강자의 권력과 금력, 조직의 힘을 가진자의 변명만 선으로 입증해줄 뿐, 합목적 법의 정신을 보호하지 않는다. 행정강제란 절차를 무시한 국가조직의 폭력이다. 정당방위를 가장한 과잉진압이다. 짓밟힌 후, 죽지 않고 용케 살아남은 굼벵이처럼 그들이 무시한 절차를 따지기 위해 이득이 없는 세월을 탕진하는 싸움은 결국 자멸하는 자충수가 되고 만다. 담당자들은 민생착취공로자로 승진하여 자리를 옮기면, 그 책임당사자는 국가로 둔갑한다. 이래서 행정제국은 <싸르트르>의「에로스트라트의 뽈·일베르」같은 시민을 만들고, 크게는 빈라덴의 맨하탄을 만들게 하는지도 모른다.

   겨울을 부르는 늦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낡아 갈라진 슬라브 지붕이 새어, 나의 침실과 서재의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받이 물동이가 이방 저방 서너개 씩 놓이다 보니, 이불을 덮고 누울 자리도 없다. 집안이 너무 추워 몸 녹일 곳을 찾아다니다, 농장에 버려진 경기용 자전거를 수리하여 아들의 대리점 사무실로 가서 난로불을 쬐다가 저녁때 돌아 오는 것이 나의 일과가 되었다. 아들이 궁색한 나에게 10만원짜리 수표 한 장을 줘어 주는 날이면, 나는 가슴 속으로 흐르는 눈물이 너무 뜨거워, 남몰래 아― 하고, 고개를 돌려 입을 열렸다.

   응접실 대청마루에 석유난로를 피울때면 좀 따듯하다. 그래도 장사를 할 때는 주머니에 푼돈이 남아있어 기름 사기도 쉬웠다. 그런데 요즈음은 땡전 한 푼 없는 나에게 밖으로 나갈 일이 생길까 두렵다. 친인척들의 경조사 청첩이라도 오면 아들에게 부탁하여 나를 대신하였다. 이런 나에게 장모가 난로에 석유라도 사다 넣어라고 한다. 기름 한 말로 아침 저녁 때만 아껴쓰면 일 주일은 견딜 수 있다. 기름이 떨어져 난로를 켜지 못하면, 막내 딸까지 겨울철 난로에 기름도 넣지 못하는 가장이라고 빈정거렸다. 착한 딸까지 아내와 장모는 가장을 왕때시키고 있었다.

  심지어 한글 타자가 서툴러 친구들의 많은 원고를 섬용예지에 올릴 겨를이 없어,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해도 총회시간에 댈 수가 없을 것 같아 딸에게 부탁을 하면, 아빠를 도와주려는 딸에게 아내는 돈을 받고 해주라고 충동질을 하여, 마감이 급할 때 까지 늑장을 부려 나를 힘들게 하였다. 물론 아내는 딸을 핑계로 나를 갈취하였다. 참으로 서러운 왕따를 당하고 살고 있으니, 딸마져 걸핏하면 아빠는 할 일 없이 컴퓨터만 하고 놀면서 엄마를 착취한다고 까지 하였던 것이다.

    나는 이미 고려장을 당한 존재였다. 아내가 어느 레스토랑 주방용역으로 취직을 했다. 그때부터 장모와 딸은 나를 객 식구로 취급했다. 딸은 노골적으로 어머니는 밖에서 고생하는데, 아버지는 방에서 컴퓨터만하고 무위도식하는 꼴불견을 볼수 없다고 불평이다. 평생교육이라 생각하며 다니던 방송대학등록도 중단했다.
  아내가 월급을 받으면, 나에게 용돈으로 주는 5만원으로 장모에게 빌린 기름값을 갚았다. 두 번째 받은 5만원도 석유난로에 기름을 채웠다. 이 10만원이 나를 추방한 전별금이 되었다.

   어느날 장모가 식탁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나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다른집 가장은 밖에 나가서 점심을 먹는데, 자네는 삼시 세끼를 집에서 먹는가? 나도 힘드네.」' 하는 것이다. 장모님과 함께 한지가 20년인데, 금방 새로지은 따듯한 밥을 얻어 먹어본 때가 몇 번이 되지 않았다. 항상 재가 난 식당밥 같았지만,이제 이런 밥마져 얻어먹기가 힘들게 되었다. 너무 추워서 난방 보일러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오래된 온수내관이 파열되어 지하 창고에 쌓아둔 구제품 옷들이 물에 젖어 모두 못쓰게 되었다. 도도한 교육장의 부인이란 자가 상품 피해보상은 고사하고, 집관리를 잘못해 일어난 사고라며, 책임을 묻지 않을테니, 12월 말일까지는 집수리를 할 수 있도록 꼭 집을 비워야 한다고 어름짱이다. 

   쓸 만한 옷가지를 챙겨두었다가, 기회가 오면 호구지책으로 이용하려고, 철거당한 컨테이너에 옮겨놓고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네식구가 함께 살려면 아무리 작아도 방 세 개가 있는 독채를 구해야 한다.  그런 집을 지금의 보증금 3200만원으로는 턱없이 모자라 월세 없이는 구할 방도가 없었다.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날, 아내가 동창모임의 힘든 산행을 마치고, 무사하게 돌아온 기념으로 거나하게 취하여 느지막하게 들어온날 밤, 나에게 희망을 가지라며 저금 통장7개를 보여주며 잘 보라고 자랑을 했다.

  생활비를 아꼈든, 장사 밑천을 빼 돌렸든 간에, 3000만원이 가까운 많은 돈이 장모와 막내처제와 딸과 아내와 나의 이름 등의 차명계좌에 나누어져 있었다. 아내가 나에게 숨김없이 20년의 결혼 생활동안 나 몰래 빼돌린 비자금을 나에게 정직하게 보여주며, 용기를 주었을 때, 젊은 아내가 그렇게 고마웠다. 다음날 정신을 차린 아내에게 새로운 집은 다시 살게 될 때는 당신과 공동의 이름으로 권리등기를 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12월이 되자 마음이 불안한 나는 옥봉삼거리에 위치한 대로변에 방 세개와 10여평 남짓한 점포가 붙은 5000만원짜리 전셋집을 계약했다. 그것도 세 번이 발걸음을 하여 집주인을 만났다. 월세를 주면 더 넓고 좋은 집이 많이 있었으나, 아내가 취직하고, 장모님이 생활보호대상으로 확정되면 월세집을 구해도 좋다고 약속을 하고서도, 막상 아내가 취직하고 장모가 생활보호대상이 확정되자, 아내는 친인척의 돈을 빌려서라도 전셋집을 얻어야 한다고 우겼기 때문이다.

  이제 아내의 주장대로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좁게 살더라도 아내가 저축해둔 돈과 전세금을 합치면, 전셋금을 지불할 줄 알았다. 그리고 남은 돈과 영농손해배상금 3000만원을 시청에서 받으면 헌 옷가계라도 차려 생활비라도 벌어 쓸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내는 옥봉쪽으로는 이사를 하기 싫다는 핑계를 대었다. 모든 재산을 장악한 아내는 지금의 전세금을 나누어 두 집을 얻어 따로 살자고 하였다. 응당 아내와 나, 딸과 장모님이 함께있다가, 여건이 되면 큰 집으로 다시 합칠계획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 만의 생각이었다. 전세금을 1500만과 1700만으로 나누어 분가를 하기로 했다. 나는 계약금 100만원이 아까워 옥봉동으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딸과 장모가 살집을 중아시장안에 전세집을 얻었다. 내가 먼저 이사를 나가는 전날 아내는 모든 주방기기와 살림 살이를 장모와 딸의 방에 몰아 넣고 방문을 잠가 버렸다. 텅빈 낡은 옷장에 나의 옷가지만 덩렁결려 있고, 빈 냉장고와 이불장과 TV 구형세탁기 그리고 낡은 피아노와 악기가 전부였다.

  늙어 무기력해진 나이에 세 번째 아내의 배신을 당하자 눈앞이 캄캄했다. 집 주인으로부터 먼저받은 1700만원이 나의 전재산이었다. 나는 아들에게 도움을 청하여 아내와의 별거만은 막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아들도 아내의 완강한 거부를 이기지 못하여, 여자 형제들을 찾아 다니며 중재를 부탁해 보았으나, 그들도 담합을 한 것처럼 이제 끝장을 내어야 할 때라며, 이미 늦었으니 포기하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다 늙어 망신살이 뻗힌 세 번째의 배신을 당한 후에야 나는 앞으로 재산관리를 내가 직접맡을 것이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내는 늙고 못생긴 나와 사는 것은 돈 때문이라며, 돈없는 나와 더 이상 함께 살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깨져버린 독의 물이 쏟아져 없어져버린 뒤의 후회였다. 아내는 취중에 숨겨둔 돈을 나에게 보여준 일을 아직도 까많게 모르고 있다. 처제에게 빌린 소송비용도, 전세금 빌린돈도 모두 나의 돈이 둔갑한 것이었다. 삥땅전문 여차장의 근성이 발휘된 결과였다.

  항상 무 계획적인 아내의 살립살이가 납득이 되지 않아, 가계부와 점포의 경리장부를 만들어 일월수지를 기록하라고 했다가 한바탕 전쟁이 일어난 일이 있다. 대웅 나이트클럽을 경영할 때도 마친가지 였다. 아무리 해도 나의 말을 듣지 않아, 영수증 자동발급기를 겸한 금고를 구입했다. 아내는 점포일을 거부했다. 자기를 믿지 못하여 영수증 발급 계산기를 사들였다는 것이다. 나는 젊은이들이 계산기 영수증을 발급해 달라고 하니 할 수 없다고 설득했다. 아내가 결사적으로 일월수지계산을 끝까지 공개 하지 않았던 오늘의 배신을 준비한 것이었다.

  

2

    나는 보증금 1500만원을 걸고 월35만원의 월세를 물어야 하는 다급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사를 하고 남은 돈은 월세로 깎여 나갔다. 아무런 돈벌이가 없으니, 생활비는 물론, 전기 수도 등 공공료금과 자동차유지비도 걱정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전세보증금마져 다 없어지고, 신용불량노인으로 노숙자가 되기 십상이었다. 배운 기술이라도 써먹을 생각으로, 점포을 꾸며 증명사진이라도 찍어 보려 하였으나, 몇 십만원의 비상금만 날려 버린 꼴이 되었다.

   라면 하나를 구하기도 힘들정도가 되었다. 옥봉 뒷산에 등산을 하면서 주어온 시래기를 삶아 간장이나 된장에 묻혀 배를 채웠다. 한 개의 라면으로 하루를 보낼 수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이러다간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부산의 작은 처남이 전화를 했다.
  「이 서방, 자네 그 애들을 그냥 놔 둘텐가? 배은망덕해도 유분수지!」하며 자기 같으면 법적으로 라도 재산을 몰수하고 이혼을 해 버리겠다는 말투였다.

  아마도 아내의 여형제들이 부산 오빠들을 만나, 나를 알거지로 추방해 버린 변명을 한 모양이다. 법을 잘 아는 내가 막다른 해꼬지라도 할 줄 모르니, 내가 신뢰하는 작은 오빠에게 나의 마음을 한번 떠 보라고 한 것 같았다.
「어쩌겠소. 내가 무능해서 그런걸.」하고 아무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멋적은 듯 가만히 있다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여동생 심부름을 하는 처남이 더 가소로왔다. 그 뒤에 또 큰 처남의 큰 아들이 노아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무사히 끝장이 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언젠가 그들의 배은 망덕이 어떤 눈물을 흘리게 하는지 바라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더 이상 나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지않기를 바랄뿐이다.

   두 번이나 그렇게 속고도, 마누라의 말을 믿고 진주로 이사를 가 살다가, 다 늙어서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란 철학관 누님의 말이 생생하게 떠 올랐다. 그 바람에 누님과 격한 언쟁을 하고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누님과 상면하지 않은지가 수년이 지난 상태였다. 잔인하도록 누님의 예언이 들어맞았다. 그렇게도 어머님과 괴정누님이 눈물을 흘리며 반대를 했는데도, 나는 기어이 고집을 부렸다. 진주로 오시기를 싫어하는 어머님을 부득이 서울 형님집으로 보내자, 방값을 원하는 형님에게 200만원을 송금해 드리면서 까지 기어이 진주로 이사를 해 버렸던 것이다.

    그때의 잘못이 지금 나의 처량한 자화상으로 되돌아왔다. 그래도 숨김없이 도움을 청할 사람은 괴정 누님 뿐이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누님을 찾아갔다. 누님은 예견이라도 한 듯이 저녁상을 진수성찬으로 차려 주시고 앞자리에 앉으시며 천연덕스럽게,
  「어제밤 꿈에 네가 우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다.
  「죄송합니다.」하고 나는 멋적게 웃었다.
  「나는 네 집을 친정으로 여긴다.」하고 집에서 일이난 일을 알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나는 지금의 심정을 어떻게 설명할까 생각하며, 누님이 가득 부어준 맥주잔을 조심해 마시는데, 울컥하는 서러운 마음이 북바쳐 올랐다. 나도 몰래 숨길수 없는 눈물이 맥주잔에 떨어졌다. 누님은 못 본 척 하고 일어서더니 후라이 팬위에 조기 한 마리를 데워 접시에 담아, 불고기 접시 옆에 내려 놓는다. 나는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장난 같은 말소리로
  「서울 형수는 처음 파탄의 동조자였고, 태희누님은 두 번째 파탄의 동조자 같아요. 이 번의  파탄은 누님이 예언으로 나를 저주하여 생긴 파탄 같아요.」하고 나는 피식 웃었다.

 「바보같은 놈, 제 잘 난 고집이 만든 일을 남에게 탓 해!」하면서도 누님은 나를 가엾게 여기는 것 같았다. 호통을 치며 당장 나가라고 내 쫓을 줄 알았던 나였다. 나는 솔직하게 알몸으로 쫓겨났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나 혼자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누님곁에서 당분간만 살게 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부산에서는 나의 기능으로 호구지책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누님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내 친정이 없어져서야 되겠느냐? 그리고 가문의 문중을 지키고 있는 너를 존경하고 있는 부산의 조카들에게 실망을 주어서도 안 된다. 큰 소리 친 값은 죽을 때 까지 정직하게 지켜야 한다. 그리고 제발 마음 속에 있는 말은 네 여자에게 말해선 안된다. 재산관리를 아내에게 맡기지 않겠다고 선언 한 이상, 네 혼자사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하시며 내일 진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렸던 나는 진수성찬으로 포식을 하고, 따끈한 방에서 편안한 잠자리에서 잠을 자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 줄 새롭게 깨달았다. 어머니의 품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누님은 조카들이 집에 오기전에 떠나라며 서두르신다.
 「힘 들어도, 너의 집을 가꾸고 지켜 나가야 한다.」하시며, 차비를 두둑하게 쥐어주신다.
 「막내 누님과 함께 이사한 너의 집에 한 번 다녀 가마.」하고 약속을 하신다. 누님이 생각밖의 용기를 주시는 바람에 나는 진주를 탈출 하려던 생각을 접었다.

    이렇게 어려울 때, 진주시에서 이자를 지급하겠다던 손해배상금 3000만원을 일시불로 나의 계좌에 넣어주었다. 전세금을 보충하고 월세를 줄여 생활비를 마련해 볼 계획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아들은 나에게 생활비 월20만원을 지원하기로 하고 나에게 제공한 외상가전제품 값과 소송비용을 합하여 1000만원이 넘는 돈을 받아갔다. 아내도 처제에게서 빌린 소송비용을 돌려 주면 집에 들어오거나 이혼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바람에 1000만원을 아내의 계좌에 넣어 주었다. 소송비용으로 쓴 돈은 400만원이었다. 결국 아들처럼 600만원을 더 앗아갔다.

  나의 손에 들어온 손해배상금 3000만원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한푼도 남지 않았다. 그뒤 아내는 이혼을 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며 합가를 거절했다. 아들이 보내주는 20만원으로 생계가 어려워 서울 형님에게 입쌀이라도 사달라고 SOS를 보냈다. 첫달은 20만이 구좌에 들어 왔다. 다음 달 부터는 매월 10만원이 보내왔다. 한 달에 30만원으로 공과금과 식생활을 해결하다 보니, 주택 임차료 월35만원은 점점누적되어 갔다. 라면 한 개로 하루를 살더라도 빚만 없으면 살 것 같았다.

   나의 노년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어 버린 진주시의 부패행정이 원망의 한이되었다. 지금도 공무원이라고 하면 모두가 소시민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와 같다는 잔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처 자식들은 나에게는 더 바랄 것 없이 끝나 버린 고려장의 여생으로 여기는 것 같다.
   아들마져 한동안 약속을 어기며 생활비를 중단하기도 했다. 형님이 보내준 10만원으로 라면하나도 마음놓고 먹기가 힘들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며느리에게 은행에 저축하는 셈치고 생활비 20만원을 도와 달라고 사정을 하였다. 다행으로 그 다음 달부터 계속하여 입금이 되었다. 하동 고전 선산에서 밤을 주어 팔아 보았다. 상품가치가 있는 좋은 밤이라야, 자동차 기름 값이 되었다. 제대로 관리를 못해 재가난 밤은 상품으로 받아주지도 않았다. 허리가 부러지도록 진 종일 밤을 주어봐야 라면 몇 개 사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삶거나 구어서 때를 잇는 것이 더 나았다.  

    부산의 Blawfirm에 400만원의 수임료를 선불하고 토지와 지장물 보상을 청구하는 행정소송을 위임했으나, 행정소송의 전치요건으로 중앙토지수용위원회에 재결만 청구 해놓고, 1년이 넘도록 일언반구의 연락이 없다. 라면 하나로 때를 굶어가며 피눈물의 돈으로 위임을 했으면 나의 명줄은 구해줄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돈만 챙겨먹고, 마냥 몰라라 세월을 탕진했다. 이런 작자들이 대통령 보좌관을 하고 정치를 하고 있으니, 행정제국의 조폭은 결국 그들의 대통령을 했던 사람도 자살을 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자살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들 처럼 비겁하지도 않았고, 가족에게도 떳떳한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나의 정직하고 떳떳함을 가족이 알 때까지 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동학사상이며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이다. 이것이 나의 삶의 궁극 목표이기도 하다. 어려울 때 일수록, 정직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법을 알고 마음을 닦아야 한다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너무 그리웠다. 그래서 천도교가 동학의 전신이란 말을 듣고, 진주천도교구를 찾아 나가게 되었다. 천도교인들이 동학의 후예라면, 정직한 마음으로 홍익인간을 실천하는 법을 잘 알 것이라고 믿었다.

 

3

    나는 2004년 10월 섬용회 총회 준비를 주관하게 되었다. 창간호 섬용예지(蟾龍叡智)에 자전적 엣세이 샘플로 등재할 아버지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고향의 섬진강 전설을 만들었다. 여기에 아버지의 동학이야기가 있었다. 하동 군지나 다른 사료를 찾다가 옥종 고성산 동학군 위령탑이 건립된 동학성지를 알게 되었다. 진주교구장의 안내로 2005년 11월 11일 11시에 고성산 위령제를 참관했다. 나는 예전부터 이곳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마치 동학(천도교)을 믿어온 사람처럼 자각하였다. 너무나 생생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 후부터 진주교구 시일식에 빠지지 않고 참관했다. 큰 절로 인사를 하는 모습이 불편하였지만, 선비의 진실한 마음을 보는 옛 모습으로 좋게 여겼다. 이듬해 2006년 1월 8일 아버지의 형상이 나의 뇌리에 감응하는 듯한 천도교 입도식을 하였다. 교구장이 선물로 내려준 경전과 21염주를 들고 그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주문과 기도에 몰입했다. 이 때가 가족과 결별하여 외로운 시련을 감내하고 있던 때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감응이 이성을 잃지 않고, 정직한 마음으로 견디게 한 것이란 경전의 의미가 나의 의지를 새롭게 갖도록 해 주었다.

   경전의 말씀대로 3년간 마음공부를 위한 수련을 해 볼 심산이었다. 행복도 편안도 스스로 생각을 바꿀 때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수련중에 깨닫게 되었다. 하루 아침에 편안한 마음을 가질때, 다른 사람들은 나를 보고 무엇이 좋아 싱글벙글 웃느냐고 말했던 것이다. 나는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표정이 달라졌다고 한다. 아버지의 말씀이 어려울때 일수록 정직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이 이런 것이었다. 내가 떳떳하고 정직함을 지키면 모든 것이 바른대로 이루어 지는 한울님의 의지가 된다. 주장도, 원망도, 증오도 부질없고 어리석은 것이란 뜻이다.

   부산의 누님들이 찾아오셨다. 두 분이 편히 주무실 이부자리가 없자, 시장으로 나가 누님들이 덮고 주무실 이부자리와 전기장판 한 세트를 사오셨다. 하루 밤을 묵고 돌아 가시며, 나의 전셋집 전세금을 충당하여 안정된 독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부산으로 내려 가셨다.
 「전세금 5000만원이 걸린 것을 알면, 또 다시 회유할 것이다. 남보다 못한 처자식이 너를 두고 생긴 말이니, 혼자 살아갈 준비를 해라!」하시며 마치 나의 친정을 제발 똑바로 지켜달라고 부탁을 하시는 것 같았다.
 「내년만 참고 견디면, 너도 괜 찮아 질 것이다.」하고 예언을 하듯 용기를 주신다.
 「그렇지 않아도 내년에는 끝장을 내야겠어요.」하고 나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른 연락이 없는 부산 B lawfirm에 전화와 수차의 방문을 하여 원성을 높였다. 변호사란 작자들은 뒷전에 숨어 앉아, 마치 전위병처럼 사무장이 나서서 귀찮은 듯이 나를 상대 한다. 우리나라 변호사 사무실은 전부가 이 꼴이다. 사무장은 전화연락처와 주소를 가르쳐 줄테니, 내가 직접 중토위에 민원을 넣어 보라고 발뺌하는 바람에 화를 내고 돌아왔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사무장이 자르쳐 준 중토위에 전화와 인터넷으로 내나름대로 엄청나게 큰소리와 욕지거리로 이판 사판 호통을 쳐 버렸다.

   그러나 그 담당자는 일이 밀려서 그런 것인데, 당신의 일만 먼저 하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흰소리다. 나는 민원처리 법정시한을 무시하는 권리가 당신에게 없다며, 당장 그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인터넷 신문고에 직무태만을 고발하는 형식으로 당당관을 퇴출하라고 청원을 내었다. 그러나 마치 석양이 지는 앞산을 개가 짖는 것처럼 아무런 메아리도 없었다. 더 기다릴 수가 없어 같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을 때는 담당관이 경질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화를 내지 않고 민원처리가 늦어진 연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사무인수가 끝나는 대로 곧 처리일자를 통보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않아 토지감정일정 통보가 나에게 직접 보내왔던 것이다. 감정을 마치고 나면 늦어도 내년에는 예산 배정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돈을 주고 위임한 로펌에 내가 보고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대통령이 나고, 보좌관이 난 정부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민생을 착취하여 정부를 이롭게 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두 곳의 감정사가 현장에 없는 지장물감정은 할 수 없으니, 토지만 감정하여 보상금이 책정되었다. 지장물 보상은 행정소송으로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였다. 이 내용을 들고 로펌으로 갔다. 행정소송을 하지 말고 그만 중지를 하라는 것이다. 나는 이 로펌에 위임한 소송비용 때문에 나의 가정이 풍비박산되어 버렸고, 라면 하나로 하루를 사는 독거 노인이 되어있다고 원망했다.    그들은 가정을 해체케 한 2천여만원의 소송비용 중에 행정소송비 330만원을 돌려 준다며 기어이 행정소송을 하러 들지 않았다. 고등법원 조정당시 재판장이 산정해 준 지장물 보상금 2억7천만원과 토지보상금 2억 4천만원 중에서 2억 천만원만 보상을 받게된 것이다.

  나는 로펌을 나오면서 당신들이 나를 괴롭힌 만큼 엄청나게 후회하고 눈물흘릴이 앞으로 닦칠 것이라고 저주했다. 입살보살인지, 퇴임한 대통령이 자살을 했다. 정치도 거짓말로 해서는 안 된다. 그 값은 온전히 그대들의 것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때를 굶던 나는 이 돈이라도 받아 먼저 많은 분들이 도와준 은혜(빚)를 갚고 싶었다. 행정소송으로 가지 않고 보상금을 청구하는 나에게 진주시와 부산국토관리청은 서둘러 봉합하려는 듯이 2억 천만원을 나의 계좌에 넣어 주었다.

  형님과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생활비를 보내주지 말라고 했다. 왼쪽 아픈 가슴이 났는 것 같다. 다음 번에는 부산의 누님에게도 나의 새 집을 구경하러 오라고 전화를 걸며, 누님께서 도와주신 큰 은혜가 이렇게 성공을 이루어주셨다고 정직하게 감사를 올렸다. 나의 오른 쪽 가슴까지 펑 뚫리며 하늘이 파랗고, 나무 잎새가 푸르게 보였다. 경구에 천불생 무록지인(天不生 無祿之人)이라는 말씀이 있다. 자기의 목은 다 정해져 있으므로, 욕심을 부려도 갖지 못하고,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제몫은 돌아오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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