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국문학과 학생상

 

국문 4년 이진원   

   많은 지식과 정보, 그리고 견문수학을 통해 얻은 효잡한 학문일지라도 벼리에 따라 바르게 정리하는 것은 서말의 구슬을 꿰어 보배로 만드는 것과 같다. 나름 대로 도야한 자기의 학문을 남을 위해 베풀수 있게 하는 상학의 벼리가 국문학이란 것도 방송대학 학습 15년만에 알게 되었다.  
   나름대로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기위해 학문을 독공할수록 무지의 산이 가로막았고, 이를 넘기 위해 미지의 학과가 줄지어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그 넓고 긴 징금다리를 건너게 해 줄 수있다는 국문학의 관문이<思無邪>였다.

   물론 모든 학문이<思無邪>로 해탈되지 않고서는 이룰 수도 없고, 인간을 위한 학문이 될 수 없다는 진실을 알았다는 의미다.  특히 국문학과는 영원한 방부성을 가진 질긴 실타래라는 확신이 서기도 했다. 아무리 좋은 원단으로 최상의 디자인을 했을지라도, 오염되고 부패한 실로 봉제를 했다면 그 옷을 입은 사람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세계인이 미국 서부개척사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청바지를 보라. 나는 청교도들이 신의 의지인<思無邪>를 형상화한 것이 바로 이 청바지라고 생각한다.

    세계인의 실용성을 대변한 청바지의 위력은 그 원단과 디자인이 아니라, 옷을 지은 실과 봉제기술에 있다. 바로 청바지를 봉제한 실과 봉제술이 문학을 대변한 <思無邪>, 또는 'God We Trust' 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思無邪>를 형상화 하여 기어이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였다.

   

   독자는 글을 읽고 난뒤에 글 쓴 사람의 생애를 되돌아 보고 그를 흠모하여 행동으로 보이는 경향이 많다. 그래선지 글은 자신의 삶이나, 소재의 진실을 정직하게 형상화 하는 경우가 허다 했다. 그런데 우리의 현대 문인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독자들의 의구심을 남겨줄 때가 더 많다.  언행일치의 삶이 독자들에게 보여지지 않고, 문체의 기교만 부린듯한, 식상한 음녀의 화장술같다는 느낌이다.

  법화경에 있는 글을 보자.
  慾知前生事 今生受者是(욕지전생사 금생수자시)
  전생의 일을 알고 싶으면 현재의 삶을 보면 알 수가 있고
  慾知次生事 今生作者是(욕지차생사 금생작자시)
  다음 생을 알고자 하면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면 알 수가 있다고 했다. 

  또  천도경전에 사람의 말은 믿음이라 이라고 했다. 즉 남을 믿게 하고 남을 불신하게 하는 것이 말이란 뜻이다. 사람의 진실을 믿음으로 형상화 하는 것이 글이라면 문학은<思無邪>의 형상화가 아닌가.

  성인들의 언행을 글로 남긴 것을 <경전>이라 부른다. 경전의 말은 명확한 결과를 얻는 불변의 진리 이기에 우리는 공경과 믿음을 갖는다. 그래서 인간만이 이를 공경과 정성과 믿음으로 그 진실된 진리를 추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문인이나 문학도가 아직도 덤으로 존경을 받는 동기가  문학이란 벼리를 매개체로 한 까닭이다.  언행 일치로 실천하여 올바른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 그 형상화가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벼리를 벗어난 사람은 문학도나 문인이 될 수가 있겠는가.

   요즘 수많은 사이비 문학잡지가 범람하여 눈먼 강아지도('齋재狗구三삼年년能능風풍月월')글을 쓰고 등단작가란 이름을 얻는다고 하니, 문학이 거짓말 잘하는 취미생활로 여겨질 정도다.   등단을 빌미로 수백권의 잡지를 강매하고, 신인등단작가란 호칭을 주면서 궁핍한 원고의 충전을 위해 초대작가의 이름을 붙여주며 문학도나 초년생들의 정신노동을 가렵주구 하고 있는 문학지가 상당수다. 그러기에 요즘 유식을 자처하는 상상의 청중질환에 중독된 자들의 사치품 별명이 등단 신인이란다. 

  자신의 글 한줄이 진리를 더럽힐까 무섭다고 생각하는 문인이나 문학도를 요즘 찾아보기 어렵다. 더구나 자기가 쓴 글이 남을 위해 한가지라도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목적과 의무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입에만 발린 허상의 글들이 칡 능쿨처럼 사이버 공간을 뒤덮고 있다. 우리 경남지역대학 국문학과에도 학생들이 만드는 문예지『새벼리』가 있다. '새벼리'란 四綱(禮·義·廉·恥)을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바로<思無邪>의 核이다.

  주경야독으로 평생학습을 하는 남다른 방송대학생들, 그 중에서도 국문학과 학생의 의지는 적어도 이 四綱을 기억하는 문학도다. 이래서 새벼리의 출간은 큰 의의가 있다. 그러기에 학이시습하는 순수함이 올곧게 배여있음을 보여주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많은 학우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모든 작품을 빠집없이 수록하여 교수님을 모시고 품평회도 하고, 두세 번의 퇴고를 거치는 올바른 창작모습이 보여저야 한다.

  나아가 학생들이 공동으로 함께 편집하고 꾸미서 그 모양 그대로 인쇄를 하여 만학의 학창을 더욱 값지게 만들어 가려는 의지가 보여야 한다. 그럼으로 우리 국문학도는 상습적으로  문학의 벼리를 더럽히고 한국의 문학을 불신의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는 '한말의 글 장사꾼 같은 사이비 문인들'의 흉내를 내어서는 결코 안 된다. 특히 방송대학교 국어국문과학생은 문학인이 보여주어야 할 새 벼리를 언행일치로 실천하는 의지를 올곧게 보여주어야 한다. 

   많은 학과를 답습해 온 나의 느낌은, 성실과 신의와 공경심이 가장 돈독할 것으로 생각했던 국문학과의 학우들이 다른 학과보다는 학문사상이 다를 줄 알고 큰 기대를 하였으나, 오히려 기대에 미치지 못해 참 아쉬웠다. 청순한 젊음의 학창이 아닌, 기성세대의 퇴폐에 물든 공직풍토에 젖은 한 두명의 만학도가 학생회를 관장하여 식상하게 한 연유도 있겠으나, 글은 자신이 책임을 저야 하는 말의 형상이란 것쯤은 방송대국문학도 만은 깊이 새겨야 한다는 뜻이다.  

  맨 나중에 국문학과에 편입한 것이 방송대예찬론자인 내 마음의 상처를 다소라도 감하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용기를 내어 계획된 일본학과에 편입하여 새로운 학습을 시작해야겠다는 나의 의지마저 흔들리게 만든 곳이 국문학과이기도 하다. 엄청난 실망감을 훌훌 털어 버리고 학습을 계속하여 달라저야하고 진실로 변해가야하는 방송대학 국문학과를 보고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진부한 공직사회풍토가 과연 얼마나, 지금도 이 정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