工夫는 누굴 위해 하는 것일까


글 / 이 진 원  


 초등학교입학 이후 六甲의 학습세월을 보낸 지금까지“공부는 남 주는 것이 아니다”라고 들어왔고, 13년여의 방송대학출석수업 시간에도 만학의 열정을 칭송하는 교수님들의 격려역시‘남 주는 공부가 아니라’는 권고였다. 문호 안톤·체홉이 즐겨 쓴 말처럼‘인생이란 자기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자아완성을 위한 최선의 방편이 공부밖에 더 있겠는가마는…….

  그래서 대다수 우리의 젊은 시절의 삶이―스스로 쟁취와 찬탈의 권리를 부여받는 최선의 수단이 공부다―경쟁의 학습이라고 신앙 같이 여겼고, 남보다 먼저 기득권을 쟁취하는 것이 삶의 목표이며 출세인줄 착각했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명분이었고, 자기본위의 미련한 신념으로 악착스럽게 노력하는 것이 공부인줄 알았다.


  그런데, 밀레니엄의 유행어처럼 도도히 펼쳐진 평생학습이란 제 삼 물결의 파도를 타고, 1993년 방송대학교에 입학하여, 지금까지 그 넓고 깊은 대양과 같은 학문의 세계를 탐험하듯 항행하면서, 왜 공부를 해야 하고, 진정 누구를 위한 공부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복수전공을 한답시고 다섯 번째 국문학과학습을 시작한 어느 날“공부는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야……”하는 의구심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였다. 아둔한 머릿속에서 안개처럼 뿌옇던 학문의 개념과 학술의 진면목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 한 탓일까.


  아니면, 갈바람의 서리를 만난 단풍 같은 나의 황혼이 생각을 바꾸게 한 것일까. 아니면, 젊은 시절의 용기와 의욕과 욕망의 이기심이 원망의 세월에 시달리고 지쳐, 김빠진 세모시 적삼처럼 올올이 늘어져버린 노년의 학습을 변명하려는 위선 때문은 아닐까. 그렇지만 그 것은 분명히 아니다. 공부란 사전의 뜻처럼 학문과 기술을 닦아 자아완성 하려는 방편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궁극적 삶의 행복을 위한 공동의무임을 부정할 수 없는 인간본질의 잠재가소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부란 자신의 분의를 먼저 알게 하는 것은 물론이며, 궁극적으로 남을 바로알고 올바르게 배려하기 위한 수련이라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예부터 전해온 공부의 어원을 살펴보면―학술적으로 입증된 논리는 아니지만― 서구의 표현(印區語)인 <STUDY>란‘서로(남)도와 협력한다, 또는 지혜를 모아 뜻을 이룬다.’는 공동적 사명감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기에 서구인의 공부란 개념은 자신의 이기적 권리쟁취를 위한 것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을 터득하는 노력이라 보았고, 권리보다는 의무를 갖는 편이 중하다.
  독립의 역사가 250년을 못 미친 미국이 황무지를 정토로 바꾸어 세계의 경찰국가로 그 능력을 발휘하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바로 백여 종의 다민족을 배려하여 융합할 수 있는 신의 가르침인“工夫<STUDY>”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동양사상(중국, 고전의 한국)의 <工夫>는 그 글의 형상부터‘자연의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즉,  道라는 것으로, 남에게 德을 베풀기 위해 자신을 올바르게 닦아야 한다는 강력한 수련의 메시지가 함의 되어 있다.
  글자 <工>의 모습은 하늘과 땅을 잇거나, 왼쪽 길과 바른쪽 길을 이어주는(음양의 결합; 변증법적 사고)형상이며, 글자 <夫>는 이 길(道)을 알아야 할 주체가 바로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사람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즉‘공부란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이 신의 가르침은 사람의 근본에서 나온다,’는 유일한 민족종교<동학: 천도교(人乃天)>사상과 합치되기도 한다.


  세계가 일본을 동양이 아닌 해양국이라 통칭하는 것은 공부에 대한 별개의 사고관념을 가진 때문은 아닐까. 그들은 공부를 <勉强; 벤 꾜>라고 한다. 그 의미는‘강제적으로 시켜서 따르게 하는 것’으로 영문<force>의 의미와 같다. 이는 가르치는 자의 권리(기득권)를 위해 존재하는 일방적 의무로 느껴진다. 이러한 <벤 꾜>가 일본의 교육관이 되고 보니, 아직도 남을 배려하는데 익숙하지 못하고 자국의 과오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국가로 남아 있지 않은가 싶다. 그런 교육관이 36년간 한민족과 대만의 교육사상을 지배했었다. 그 잔상이 지금 우리와 대만의 교육정책에 발현되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아쉽고 안타깝다.


  동서양의 교육관념 모두가‘<공부>란 남을 배려하기 위해 평생토록노력 해야 하는 수련’이라는 의미가 명백하게 들어나지 않았는가!
  바로 평생학습과 통하는 뜻이며, 이 또한 허장성세의 변명이 아니며, 공동사회의 지극한 의무임을 깨닫게 하는 신의 가르침이다. 공부란 올바르게 알아 그대로 실천하는 우리의 선비정신과 추호도 다름이 없다.


  학자들의 심오한 학술 연구가 인류의 영달을 위한 것이란 관념은 예부터 이어왔으나, 이것이 현세에 들어 물질적 기득권(저작권)으로 돌변하여 국가와 사회를 흔들고 있다. 더욱이 이런 자들을 장관으로 중용 하고 있으니, 정부가 중풍이든 환자처럼 흔들거려 국민의 불신을 자초하지 않는가.

  관념복고의 발상전환이 통탄스럽게 필요한 시점이다. 교수와 선생, 교육정책들의 가르침이 인류의 행복, 남을 위한 <공부>란 사명감을 심어준다면 그 형상은 지금의 학습지옥에서 탈피할 것은 분명해진다.


  절실한 비유를 든다면, 법정의 판사와 검사가 평생학습이란 의미의 올바른 공부를 지속하지 않거나 자신의 역량을 개발하지 못하여 신지식과 변천된 판례의 새 법리를 모르고 있다면, 법정은 죄악의 보균 배양실이나 다를 게 없지 않겠는가.

  각계의 사회지도층, 국정의 관리자들, 고급 공직자들이 기득권보호에 목숨을 걸고 있는 추악한 모습들은“공부해서 남 주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한 것”이란 잘못된 아집의 교육관 때문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또한 이제부터 국가가 부여하는 각 종 종신면허(변호사, 의사 등)가 기득권의 쟁취와 찬탈의 비열한 권능이 아니고, 남을 배려하고, 천부의 인권을 올바르게 지켜야하는 책임과 의무라는 생각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천륜의 어김은 무서운 응징의 반대급부가 있다는 신념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제“공부는 남을 위해 해야 한다”고 가르쳐서 의무감의 성취를 더 행복하게 느끼는 교육패러다임전환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오늘도 나의 학습을 보고, 안타까운 눈초리로 동정하듯 공손하고, 친절하고, 다정하게, 묻는 말이 인사처럼 들려온다.

  항상 나의 대답은 자신을 알려고 하듯 변함이 없다.
  “그 연세에 힘든 공부를 왜 하십니까?”

  “손자들에게 거짓말 좀 적게 하려고!”

<2007. 11. 14 옥봉에서 웅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