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아름다운 것임을 알게 해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이진원


만학도가 되기를 결심하다


  아내가 방청소를 하는 동안 산책을 하라기에 운동복 차림으로 뒷산에 올랐다. 어린아이도 줄달음질치는 산중턱도 못 올라 숨이 차고 가슴이 터질듯 아프고  어지러워 속까지 메스꺼웠다. 아직 이순이 채 못 된 나이다.

  벤치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 옆에 말없이 앉았다. 근심스러운 듯 처음이냐고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연세가 많은 분이다. 책을 다 읽은 듯이 덮고 일어서며‘아직 젊은데…’산책도 좀하고 책도 읽어보라며 그 책을 내 코앞에 내민다.

  파란남색표지에‘제삼의 물결’이라 쓰여 있었다. 노인은 윤기 나는 반백머리를 휘날리며 가볍게 사라진다. 얼빠진 듯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협소설속의 이인을 만난 듯 착각을 했다.

  아내가 산책을 내보낸 연유를 알겠다. 식은땀에 온통 젖은 채로 힘없이 돌아 왔다. 오늘부터 술 담배를 끊겠다고 독백처럼 맹세를 했다. 이날이 1993년 3월 1일이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니 참 상쾌하다. 아내가‘맥주한잔 줄까요?’하며 맥주병을 퐁하고 딴다.

 “딱 한잔만, 나머지는 당신이 들어요.”

  시원한 매주한잔에 정신을 차리자 식탁선반에 진열된 양주병과 고급담배에 봉인된 금박상표가 오늘따라 또렷하게 보인다.

 “작심삼일이지”하며 아내가 중얼거린다.

 “아니야, 일 년을 견뎌서 내년에 방송대학에 입학 할 거요!”

 “어디 두고 봅시다!”

  다음날 담배를 참는답시고 컴퓨터학원에 등록하여 한글워드를 배웠다. 단편적이고 산만한 강의는 몇 개월의 학원비만 낭비했다. 참다못한 나는 친구들 모임에서 ‘여보게! 우리, 방송대학에서 컴퓨터나 배우세!’하고 제안을 해봤다.

 ‘재주 많은 자네나 다니게. 이 나이에 술 담배 끊고 대학을 새로 다녀?!’하며 퇴박을 준다. 그러나 나는 만날 때 마다‘재주는 곰한테나 쓰는 말’이라며 한사코 설득했다. ‘자네가 이렇게 곰이니까 재주가 많지!’하며 흥분된 격론이 잦아졌다.

  결국 나를 소외하듯 모임까지 깨고 말았다. 흥분한 어투로‘몇 년 후면 젊은 선생들이 컴맹교장을 취매노인 취급하고, 컴퓨터상의 공개지시 외의 교장 말은 못들은 척 하다가 나중에는 명퇴를 하라는 하극상이 일어 날걸세!’하며 빈정거렸던 말이 弄假成眞이 되어 K2가 되자마자 친구들은 정년후의 촉탁은커녕 거의 명퇴를 당했다.



방송대 만학도의 능력을 인정받다


 94년 3월에 혼자 전산학과에 입학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여 입학동기와 자기소개를 한다. 회사간부, 공무원, 교사, 18세의 미성년도 있다. 

  아들, 손자, 며느리 같은 학우들이 서로서로가 배려하는 동문수학은 서로서로의 스승이었다. 첫 학기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처음 만들어 보는 과제물인데다 이렇게 긴 글을 써보기도 처음이다. 다음날 다시 읽어 볼 때마다 고쳐야 할 곳이 있었다. 한 과목의 Report를 완성하는데 일주일 넘게 밤을 새우다보니 어깨에 심한 경련이 오면서 팔이 저리고 손가락에 물집이 다 생겼다. 

  2학기는 학생회주관의 컴퓨터강좌 덕분에 컴퓨터로 과제물을 작성하였다. PC통신으로 학습정보도 얻었다. 학습관장도 경쟁하듯 함께 배웠던 기억이 난다. 첫 학기보다 많은 과목을 학습할 수 있는 요령이 생겼다.

  처음 컴퓨터로 작성한 과제물을 레이저프린트로 산뜻하게 출력을 했을 때의 감격은 정말 대단했다. 해기사가 되려고 한국해양대학 전수기관학과(국비양성)에 입학하기 전에 인쇄부처에 근무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공헌한 제일 큰 업적은 인쇄술의 대혁명이다. 방송대학에 입학하여 PC통신을 하게 된 뒤부터 지구가 작아지는 것을 느끼는 듯 했다.

  전산학과 2학년이 되던 해부터 문중은 매년 시향제례 때마다 제수준비가 걱정이다. 그 많은 종중재산이 어디 갔는지 찾아내야 한다는 원성이 커졌다. 위토와 선산을 관리하던 종손 측근들이 적자영농을 핑계로 세비를 내지 않았다.

  문중이나 국가나 의무가 결여된 기득권이 모두를 망치고 있다. 가난한 일가들을 구휼했다던 종중을 파산직전으로 몰았다. 수장어른이 나에게 종중재산을 조사하여 공개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젊은 종친회원들이 차제에 종손세습관리를 집단운영관리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나도 따라 동의를 하자 어른들이 부득불 승낙 해 주셨다. 나는 종중정관을 만들어 모든 가문의 찬동을 얻었고, 정관에 따라 임원을 선출하고 서류를 갖추어 종중재산관리를 위한 사단 등록을 하였다. 컴퓨터로 많은 정보를 쉽게 처리할 수가 있었다.

  종중회장명의로 소속관청에 청원하여 한전의 선하부지, 농업기반공사의 수로부지, 군청의 도로부지 보상 등의 해묵은 종중민원을 종결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종중토지보상에 대한 당사자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상금과 군청 지원금에다 선산과 위토를 처분한 1억5천여 만 원의 재원으로 2400기의 奉安堂 [帝鄕歸盡]을 건립하고 시향제례로 모시는 50위의 선조묘소를 모두 이장하여 이곳에 봉안하였다. 서부경남전역에 산재해 있던 묘소관리비만으로 시향제례를 모시고도 남는 예산이었다.

  종중이 안정되자 60년 전 갑신년의 전성기를 찾은 것 같다고 어른들은 기뻐하셨다. 더구나 800여 쪽의 사직공 족보를 전산입력하고 종중재산관리업무가 공개되자 방송대학 만학도의 능력이 신통하다고 격찬하시며, 생각과 행동까지 바꾸는 새로운 지식은 때를 가리지 않는 학문에서 얻는다고 하셨다.



卵投破石의 사투를 하기위해 법학과에 편입하다


  지난 1982년경 20년의 해기사생활을 접고 양사언의 시조처럼 1500평의 농장을 구입하여 뭍으로 돌아온 곳이 진주다.

  진주시청이 1984년에 이 농장을 선매한다는 조건으로 88올림픽공원을 만들어놓고 10년이 넘도록 보상을 미루어왔었다. 나의 진정과 탄원이 건설과 캐비넷 하나를 가득 채워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 무딘 칼날이 만화에서만 춤을 추는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주위의 토지들은 제쳐놓고 나의 토지만 10억대가 넘는 과표로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고도 십 수 년이 지난 후에 받으라는 보상금은 공시지가의 1/10에도 못 미쳤다. 이마저도 안 줄 수 있다며 감지덕지하게 받으란다. 너무 억울하여 삼청동으로 보낸 탄원서에다 미친 듯 고함을 질렀다.

  어느 날 담당직원이 찾아와 하수과로 가서 보상금 5억 원을 받아 가란다. 믿을 수가 없어 며칠 뒤 그를 다시 찾아가 확인을 하였다. 공시지가의 보상금은 7억인데 5억만 받으라는 것이다. 2억은 국고가 되느냐고 따졌다가‘ 형편없는 늙은 개’라는 욕을 얻어먹고 집단폭행마저 당하고서도 공무방해죄로 벌금을 물었다. 그들 말대로‘똘똘 말아 죽여 버려!’라는 행정제국의 위력을 실감한 순간이다. 사직당국이 행정서기의 거짓말에 맥을 못 추는 형국이었다.

  고소는 내가 했는데. 적반하장도 유만 부득이다. 검경이 쌍둥이의 노래같이 묻는 말에 대답만 하란다. ‘시장 욕했소? 공무원 욕했소? 10억짜리 땅 있다고 큰소리 쳤소? 나한테 몇 평 안 줄 거요?’하는 빈정거림이다.

“ 인간쓰레기들!”

“ 어, 이것 봐라! 늙은 기 형편없어, 맛 좀 볼래?”

  충절과 예도의 이름이 잘못된 고장 같다. 오죽했으면 동학운동이나 형평운동이 이곳에서 융성했을라고. 충절이나 예도의 이름을 붙이게 해준 선인들은 진주의 터주 대감들이 아니다.

  부득이 변호사를 찾았다. 어느 곳이든 냄새 맡는 똥개를 앞세운다. 변호사의 사명? 봉사? 차라리 모기 쓸개가 더 클 것이다. 대 법전에서 변협의 강령을 지웠으면 좋겠다. 선진국은 변호사 사무보조원이 법률상담을 안 한다. 금권을 가진 자들은 감옥을 엄청 무서워하지만, 서민은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는 것이지 감옥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폴 뉴먼의 법정’과 ‘필라델피아’의 音樂과 映像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게 한 것은 법학과에서 공부를 시작하고부터다. 

  전산학과4년을 학습하고 졸업을 미룬 채 서둘러 법학과2학년에 편입한 것은 행정부패와의 투쟁을 위한 준비였다. 법학과편입동기를 말하는 현직교사, 경영학박사, 의학박사 몇 분은 변호사친구의 배신을 바로 알고자 법학과를 지원했다고 하였다. 나의 생각과 다름이 없다.

  pc통신이 고속인터넷으로 발전했다. 편입생도 기초과목을 예습하기가 쉬워졌다. 더구나 cyber공간에 개방된 Law-firm이 많아 법리실무를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민원처리의 위법성이 구체적으로 이해되었다.

  법학강의에서‘모든 위법은 법원의 판결에 의하여 인정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감성적 호소는 부질없는 일이다. 동시에, 법은‘약자에겐 의무만 강조되고, 강자에겐 권리가 옹호된다.’는 것을 깨닫게 한 곳도 나의 법정이었다.

  옛 부터 개혁되지 못하는 나라는 진부한 법원을 가졌다고 했다. 우리의 법정은‘運 七 技 三’이란다. 진실이 운수에 따라 밝혀진다면‘運 三 技 七’이 되는 날은 언제쯤일까. 아마도 법관, 법률가가 혁명을 겁내지 않는 때일 것이다.

  어느 날 시청에서 받아가지 않는 보상금8천 여 만원을 이월하기위해 공탁을 한다는 통지를 보내왔다. 예산을 더 청구하여 합의보상을 해 주려는가 기대 했었다. 그런데 수개월 후 의료보험공단에서 보험료 감면통지가 왔다. 두 세 번의 행정심판에서 탕감불가결정을 했던 월10만원 가까운 의료보험료를 탕감해 준단다. 너무 고마워 영문을 물었다. 10억대 과표의 토지가 국유가 되었기 때문이란다. 예산이월공탁을 원인으로 토지조서도 없는 토지를 등기관의 직권으로 국유이전등기를 경료 해버리고 나에게는 적법한 예고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국사범이다. 그러나 이것도 법원의 판결로 밝혀야한단다. 이것이 법리상의 민주주의란다. 진주법원은 나의 이의가 이유 없다고 기각하면서 항소할 수 없다는 단서까지 붙여 회신하였다. 국사범은 항소를 할 수 없는 것일까. 엿장수 같은 등기관이나 행정서기의 직권 앞에 서민의 인권이나 사유권은 사실상 없는 것이다. 결국 대법원의 승소판결을 받아낼 수 있는 자들만의 민주국가인 셈이다.

  쟁송실무를 경험하면서 법학강의를 듣는 것은 인생의 멋진 篤工이었다.

  법학과를 졸업한 이후의 나의 법정은 초라하게 보였다. 강자의 거짓을 인용한 오판을 숨기지 못하는 법관의 비열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법원과 사직당국에 계란을 던지지 않고 바치고 싶은 날은 언제가 될까. 팔레스타인의 눈물은 이스라엘이 생긴 탓일까? 이 같은 서러움이 우리에게 또다시 밀려오는 데도 정신 차리지 못하는 민족으로 남을 것인가!



가장 행복했던 부부방송대학생


  쟁송실무를 동냥해가면서 무기력하게 악전고투를 했던 길고긴 쟁송은 어느 양심가의 조력을 얻어 기어이 대법원승소판결을 받아냈다. 참으로 백전 백일 기였다. 진주지원의 위법등기를 직접 말소하고 20여년 해기사의 한이 담긴 채 남강에 빠져버린 땅을 기어이 건져 올렸다. 

  이후부터 중학중퇴의 아내는 나의 방송대학생활을 진심으로 동경하기 시작했다. 진주시청은 대법원 승소판결이후 더 악랄하게 토지보상을 기피했다. 또다시 그토록 지겨운 행정심판청구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청구할 때마다 무당의 염불처럼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결정문이건만‘청구를 기각 한다’는 결정요지는 두터운 글씨로 분명했다.

  민원의 무덤이 되어야할 행정심판이 솔거의 벽화가 되어 수많은‘버지니아 이즈마헬’같은 참새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고발하는 심경으로‘행정심판의 효율적 운용’이란 제목의 졸업논문으로 법학과를 졸업했다.

  어느 날 아내가‘당신이 법학과를 졸업할 때 나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졸업한다.' 하며 부끄러운 듯 자랑했다. 천진한 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바람에 잘했다는 칭찬도 못했다. 문민의 가면극이 국민이란 판소리로 바뀐 때가 법학과 3학년이다. 법무사 기출문제집을 사면서 고입검정고시문제집 한권도 샀다. 곱게 포장하여 아내에게 선물했다. 언제나 남 앞에 나서지 않고 무표정했던 아내가 이 책을 보는 순간 자신 없듯 홍조를 띄면서도 강한 의지를 보였었다.

  내가 중문학과에 편입할 때 아내는 돈벌이를 해야 한다며 경영학과로 입학하였다. 그토록 갈망했던 아내의 대학생활은 우리가정의 생활고를 극복하는 얼이 되었다. 우리부부가 가장 행복했던 때가 방송대학을 함께 다녔던 3년간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가장 불행한 시기가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인가 보다.

  민원처리 불능국가처럼 나의 민원은 괘씸죄에 걸린 듯 지금도 소외되고 있다. 토지보상법상의 중앙토지수용위원회의 재결기간은 늦어도 2개월 내에 종결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정은 오래전에 파산되었고 2년 전부터 이산가족이 되면서 경영학과를 마치면 국문학과에 같이 편입하자고 했던 아내를 부득불 휴학 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아내는 페미니스트처럼 나에게 능력 없는 가장이 가족을 떼어놓고 혼자 상상의 청중 속에서 자기최면의 노년을 산다고 불평하면서도 지하철의 노숙자 신세를 면케 해준 방송대학이 그래도 고맙다고 한다.

  오광대문민제국-판소리국민제국-장끼자랑 참여제국-민원불능공무원제국-?

  우리가족의 생존권을 침해하고 가렴주구로 가정을 파괴해버린 그들이 그래도 우리부부에게 배려해준 것은 오직 적은 돈으로 평생학습을 할 수 있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를 국립대학으로 남게 해준 것이다.



큰일을 위해 중문학과를 졸업하다


  전산학과 4학년 때 800여 쪽짜리 사직공 족보를 전산입력한 후 서책으로도 출간하였다. 전통족보의 종서를 횡서로 바꾸어 인명 찾기도 쉽게 하였다. 처음 반대하셨던 어른들이 이제는 대동보전체를 전산처리하자고 제안하신다.

 누가 하든 꼭 해야 할 일이기에 고급노트북을 마련하고 대동보전산입력을 시작했다. 엄청난 이 작업은 법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중문학과에 편입하도록 만들었다. 한자를 잘 알고 컴퓨터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도움을 얻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합천이씨 전서공파보만 해도 3500여 쪽이 넘는 분량이다. 혼자서 단시간에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방송대학 학우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파보가 끝날 무렵에 중문학과도 졸업하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중어중문학과에 편입한 후에야 한문에 무식했던 나를 발견하고 대동보전산화를 하겠다고 덤빈 무모한 사실을 깨닫기도 했었다. 지성감천인지 한울은 나를 도와 주셨다. 愚公移山처럼 하루 한 두 쪽, 일 년에 400여 쪽 한권씩, 삼년이 되자 어느새 전서공파족보가 완전하게 입력되었다.

  족보의 전산처리도 가치를 재창출한 예술이다. 엄청난 노력으로 얻은 좋은 결실을 베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세상에 펴내어 객관적 검정을 받고 정보가 보정되어야 사료로 보존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산입력보존기능은 수시등재를 함으로써 20~30년 주기로 한꺼번에 족보등재를 했던 엄청난 수고와 재원의 낭비가 없어지는 것이다. 

  문중의 젊은 종친회원들은 입력 되는대로 cyber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입력된 자료를 안전하게 보전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홈페이지 전문제작업소에 상담을 했더니 페이지 당10,000원 이상이 소요되었다. 입력된 데이터를 하이퍼텍스트로 바꾸는 것인데도 종중재산을 몽땅 털어야 할 판이다.

  부득불 방송대학서점에서 나모에디터 FX suit라는 두꺼운 책을 샀다. 책속의 할인안내를 보고 프로그램도 샀다. 족보를 입력하듯 한 페이지씩 꼼꼼하게 반복하며 실습했다. 두꺼운 책이 어느새 다 읽어졌다. 세 번째 읽을 때부터 한 페이지씩 차근차근 만들어 글과 사진을 올려보았다. 신기하게 사진이 움직인다. 손 벽을 치면서 좋아했다. 아내를 불러 홈페이지가 작동한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많은 자료가 체계적으로 원활하게 작동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지역대학의 교수, 조교, 학우, 교직원에게까지 찾아다니며 상당기간 공부해도 잘 되지 않았다. 다른 책을 사서 다시 공부 해봐도 원하는 만큼 되지 않았다. 미디어영상학과 3학년과목만 잘 이수하면 동영상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급한 마음으로 당초의 국문학과편입을 미루고 미디어영상학과 3학년에 편입을 했다.



미디어영상학과에서 어문의 개념을 깨닫다


  내가 공부하고 싶은 과목들이 모두 3학년 학습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2학기가 끝날 무렵에 나의 홈페이지(http://ijinwon.kr)는 어설프지만 제대로 돌아갔다. 모양새는 없어도 이젠 인터넷 방송도 해낼 것 같다.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데 자신이 없었던 내가, 경우에 따라‘글은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하는 확신을 얻게 되고, 남의 글까지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고 혀끝을 흔드는 불만을 갖게 된 것은 큰 기쁨이었다.

  학문과 예술은 좁고 깊게 파고들수록 직업본능의 이기적 질곡으로 함몰되지만, 넓게 펼치는 많은 지식은 봉사적 의무를 깨닫게 한다. 이것이 동학의 진리다. 가능성의 기대 속에 처녀졸작수필 두 편을 제30회 한국방송대문학상모집에 출품했다. 그 중에‘동란의 여명’이 가작으로 뽑혔다. 난생처음 만들어 낸 큰 자랑이며 큰 감동이었다. 13년의 긴 만학의 세월이, 겨우 나의 생각을 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을 받은 것이다.

  시상식과 축하연에서 고희가 다된 노년의 처녀작품이 방송대문학상을 받았다는 것과 평범한 생활의 소재인데도 자연을 통찰하는 깊이를 느끼게 했다는 서평은 참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만학은 사람의 말이 곧 믿음(信賴)이라는 가치로 알게 해주었다. 그래서 성인들은 말을 글 쓰듯 하는 것임을 알았다.

  감성적이면서도 의욕적인 나에게 온화한 예술적 이성을 접목시켜준 곳도 방송대학이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보게 되고, 바르게 행동하는 인간이 된다.’고 방송대학에 다니는 이유를 웅변한다.

 나의 가족과 친구, 나아가 우리 인생의 보람된 마감을 위해, 그리고 영혼의 안식처를 위한 봉사까지 완수 하고자 cyber 공간에서 미완의 하회탈 같은 홈페이지(http://ijinwon.kr)를 가꾸며 봉사하는 노년을 산다. 만학은 대지와 거래를 하는 것처럼 노력한 만큼 이자를 붙여 넉넉하게 되돌려 준다는『키케로의 노년을 위하여…』과 같이 여긴다.

  나의 방송대학생활이 이처럼 귀중하다.

  오늘도 손자 손녀의 벗이 되고자‘우몽아, 을유야! 할아버지다.’하며 그들의 게시판에 글을 올린다. (94학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