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과 동란 

                                                                                 이 진 원  
<동란과 우리가족>

  올해는 유별나게 참외와 수박이 너무나 잘 되어 여름철 인심이 좋아질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표정이 정겨워 보였다. 벼농사도 잘되어 풍년이라 하시며 시국만 조용하면 부국이 될 터인데, 위정자들이 제몫 찾으려고 싸움만 벌이고있으니 결국은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 것이라고 걱정하셨다.
 

  1950년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많은 군대가 학교운동장에 주둔하면서 교실을 군부대 군인숙소로 사용하면서 방학은 앞당겨 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당한 엄청난 군인들이 후송되어 교실을 넘치더니 나중에는 운동장에 즐비하게 환자를 눕히고도 모자라 중학교 운동장으로, 광평 송림까지 천막을 치고 환자를 옮기기 시작하였다.


  아버지가 이야기 해 주신 예전의 동학군이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송림에 모여있다 모두 불쌍하게 죽어 갔을 것이란 생각이 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가 피난을 떠난다고 야단법석이니, 우리가족도 읍내 집을 비우고 조용한 시골에 묻혀 있다가 형편을 보자고 하셨다. 다섯째 누님과 자형을 따라 막내 누님, 형님, 나는 고전 잣내부락 계곡 깊은 곳에 있는 외딴 친척집에서 여름한철의 피난을 하였다. 지금은 이곳이 내 손으로 설계 건축한 <합천이씨종중납골당>이 기념비로 건립되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님은 강둑아래 참외밭 원두막 밑에 방공호를 파고 그곳에서 읍내를 나들며 집과 논밭을 관리하시면서, 인민군이나 치안대원이 나타나거나 폭격이 시작되면 깊은 땅굴로 숨어 조용해지기를 기다리셨다.


  그 해 8월은 유난히도 더웠다. 고전에서 살고 계셨던 사촌들이나 친척들은 우리남매를 돌보아 준다는 핑계로 폭격이 그치지 않는 위험한 화염을 뚫고 하동 ‘너뱅이’ 참외밭으로 와서 부모님이 우리들에게 나누어주라며 좋은 것만 골라 따준 참외와 수박, 그리고 많은 쌀 양식을 짊어지고 맷딧재(금호산)를 넘어 돌아오면 우리에게는 그것을 돈을 받고 되팔아먹는 얄미운 친척이었다. 돈이 다 떨어져 사 먹지 못하면 직접 가서 갖다 먹으라고 하였다.


  전쟁와중에서도 포탄을 무서워하지 않는 그들의 욕심은 생명의 존귀함 자체를 부인하는 어리석음으로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많은 가족이 굶어죽을 판이니, 포탄에 죽으나 마찬가지란 절망 속의 행동이라고 보아야 하고, 가족의 생존을 위한 아름답고 처절한 노력이라고 보아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남매들은 배고픔을 더 참지 못하고 직접 갖다먹으라는 사촌의 말대로 부득이 형님과 나를 하동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형님과 나는 늦은 오후 맷디재 고개를 넘으려 하는데 하저구 동리 ‘너뱅이들’ 언저리 계곡에서 인민군과 국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기관총과 대포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우리는 도저히 그 전장의 계곡을 지날 수가 없었다. 형과 나는 숲 속에 숨어 군인들의 전쟁놀이를 구경하며 해가 지면 되돌아가기로 하였다.


  장난감 같은 작은 짚 차 한 대가 하동읍 쪽으로 빠른 속력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국군의 차 같았다. 들어 갈 때는 엄호 기관총 소리가 계속하여 났고, 한참 있다가 다시 빠져 나오 곤하였다. 아마 부상자를 결사적으로 실어 나르는 용감한 장면 같았다. 짚 차가 빠져 나 올 때마다 인민군의 포탄이 차 앞과 뒤쪽에서 터지면 멈칫 섰다가 또 달려나오고 어떤 때는 차 바로 뒤에서 터지면 차가 훌쩍 뛰었다가 또 달아나고 하는 것이 참으로 용감한 불사신 같았다.

  세 번 짼가 내 번짼가 불사신 같았던 그 용감한 짚 차가 국군진영에 다 다가와서 직격탄에 맞아 굴러 떨어지고 자욱한 연기 속에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형님과 나는 서로 처다 보며 약속이나 한 듯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성아 짚 차가 그만 맞았재?”

“응 그만 맞았다”

 형님과 나는 두 주먹 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산허리가 검은 연기로 뒤덮인 채 화약냄새를  풍기는 산등을 넘어 계곡을 따라 피난 집으로 돌아오는데, 피난 집 친척형님의 친구인 동리 아저씨가 우리를 조용히 부른다.


“어이 학생들, 이리 좀 오게!”

“아저씨!”

“음 너희들이 구나”

“이 전쟁터에 너들이 왼 일이냐?”

“하동 갈라고……”

“큰일 날라고!”

“하동 못 간다!”

“최후 발악 전쟁이다”

“국군이 전부 쫓겨가고……”

“어서 집에 가자!”

“아저씨는 여기서 뭐 합니꺼?”

“응, 먹을 기 있는가 찾아보러 왔는데……”

“참, 니 중학생이재?”

“와 예?”

“니 영어 할 줄 알 재?”

“모릅니다”

“영어사전 볼 줄은 알 재?”

“예-”

“그럼 됐다”

“어서 집에 가서 너의 형과 의논하자”

 아저씨는 주위를 살펴보더니 지게의 한쪽 멜 방을 어깨에 걸친 채 걸음을 재촉하여 피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모든 가족을 불러놓고 비밀 상의를 하였다. 미군 한사람을 집 뒤 안 땅굴에 숨겨 살려보내자고 한 것이다. 원자탄이 터질 때 전 가족이 함께 피 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은폐하여 만들어 둔 깊은 땅굴 은신처를 그를 위해 사용하기로 하고, 우리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아저씨는 형님과 나를 데리고 화염이 쌓인 그 계곡으로 다시 올라갔다.


  으슥한 계곡의 큰 오동나무 밑 바위틈 속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아저씨가 형님에게 손전등을 형님얼굴을 비추며 학생이라고 말하라 이른다. 우리의 말소리를 들고 위험을 느낀 미군은 바위 틈 속에서 철컥하며 권총에 실탄을 장전한다. 아저씨는 불안하여 조급하게 속삭이듯 말한다. 마치 게릴라 작전 같은 위기의 순간이었다. 

“빨리 후라시를 니 얼굴에 비추고 학생이라 말해!”

형님이 어물 그리며 더듬는다. 손전등을 턱 밑에서 비추니 형님얼굴이 머리를 깍은 학생귀신처럼 참 이상하게 보인다. 높고 큰 코가 더 크고 더 높아 진짜 귀신같이 보였다.


“아이 앰 마 스튜 어 덴 트”

“아이 앰어 스튜덴트!”

아무런 응답이 없다.

“아임, 스튜던트”

  형님이 다급하여 더 빨리 말하는 것 같다. 그래도 아무런 응답이 없다.

  아저씨가 미군의 발언저리에 손전등으로 가만히 비추어 본다. 미군이 손짓하는 것을 보고, 이제 되었다고 하시면서 나더러 지게를 가져오게 하였다. 아저씨는 미군을 부축하여 지게에 앉히고, 형님과 같이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꺾어 미군을 나뭇짐처럼 덮어 짊어지고 내려오면서도 형님은 뒤에 처져 망을 보며 따라오고, 나는 초병처럼 맨 앞에서 전등을 들고 신호를 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집으로 돌아와 굴속에 그를 감추어 주었다.

 

  아저씨는 권총을 가진 것으로 보아 장교라고 하였다. 미군은 포탄 파편에 한쪽엉덩이와 허벅지살점이 뼈가 보이도록 떨어져 나가 많은 피를 흘린 것 같았다. 옷을 찢어 스스로 지혈을 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가 우리를 만난 것이다.

  황토 굴속은 밤낮 없이 어둡고 습하다. 그리고 냉기가 몸을 식혀 한 여름인데도 선선하다.

형님은 얄팍한 한영단어집의 단어를 지적하면서 미군장교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통역이었다.

막걸리를 설명하고 먹이는데 한낮이 걸렸다. 지금의 내가 그때 있었다면 그 미군장교를 완벽하게 살려 보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매년 6․25만 되면 어김없이 생각난다. 나는 아직도 그 미군장교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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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비밀을 지킨다고 노력을 했는데도 보름이 채 되기도 전에 소문이 났는지, 하동 읍내 치안대원이 냄새를 맡고 지수까지 수색을 하러 왔다 갔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다행이 우리가 있는 곳은 외딴 숲이라 일족 형님을 모르는 분은 고전 사람이라고 해도 우리가 있는 집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날 가족 회의를 열고 모두의 안전을 위해 미군을 돌려보내자고 하였다. 그 미군도 우리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으니 힘이 들더라도 떠나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 미군이 지도를 땅에 그리면서 ‘메이산’ ‘메이산’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마산 쪽을 이야기 한 것으로 알고 노량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며 바닷길로 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설명해주었다.


  미군장교가 하얀 무명한복으로 갈아입고 밀짚모자를 쓴 채 간간이 절룩이며, 집 앞 논두렁길을 조심하여 걸어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자를 벗어 위로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작별의 인사를 하면서 감사하다는 말 짓은 참으로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우리들에게는 이 길이 마냥 행복이 오가는 길이었건만, 그에게는 생과 사의 갈림길이기 때문이다.


  그 미군 장교가 우리와 헤어질 때 그가 차고있는 야광시계를 벗어 형님손목에 채워주었고, 미군이 떠난다는 소리를 듣고 돌아온 어린 나를 보고 줄 것이 없자, 몸을 뒤지다 그의 군번줄에 함께 끼어있던 군번만 떼어 주머니에 넣고 사진과 이름이 새겨진 목걸이를 송두리째 나의 목에 걸어주면서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군대생활을 하면서 항상 자랑하던 이목걸이를 나도 모르게 잃어버렸다.  


  형님이 얻은 야광시계는 다섯째 자형이 기를 쓰고 빼앗아 갔다. 물론 이분은 내가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에 어려운 친정을 돌보는 누님이 싫다면서 합의 이혼을 하여 청년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믿을 수 없는 배신을 한 사람으로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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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이 들자 무더운 여름의 열기가 식어가듯 전쟁의 소용돌이도 잠잠해 지는 듯 하는 데도 불구하고 ‘색색이’ ‘호주비행기’ ‘이승만 처갓집 비행기’라는 괴상한 이름을 가진<세이브>전투기의 폭격은 갈수록 기세를 더하여, 인민군은 물론 우리들 민간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폭격하는 바람에 희생당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후부터 처음엔 우군의 비행기라고 반겨주었던 우리들도 양 날개 끝에 럭비공 같은 혹을 붙인 ‘괴물색색이’로 여기게 되었고, 누구에게나 절대적 공포의 대상이었다. 군인이건 민간이건 길이나 들판이나 산길을 갈 때도 이 괴물이 나타나면 무조건 엎드려 지형지물에 몸을 숨겨 피해야만 살아 날 수 있었다.

  요즈음 공개되는 미국의 한국전쟁기록에 미국공군의 한국인 무차별 폭격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보니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9월 초순의 어느 날 아버지와 내가 강둑에 앉아 옛날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괴물색색이’ 두 대가 소리 없이 나지막하게 우리 앞을 지나갔다. 나는 빨리 피하자고 하였는데 아버지는 저들이 우리를 민간으로 알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셨다. 그러나 곧 되돌아온 그 ‘색색이’는 아버지와 나를 행하여 기관포를 두두두 갈겼다. 우리 발 한치 앞에 한 줄로 탄 적을 내면서 총알이 박히고 뒤따라 뜨거운 큰 탄피가 우루루 우리 옆에 떨어지자 아버지와 나는 혼비백산하여 원두막 땅굴로 다음비행기가 오기 전에 숨었던 일이 있었다. 그 후부터 아버지는 미국을 믿지 말라 하더니 참으로 걱정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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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에 들자 전쟁이 다소 평온해 지는 듯 하여 형님과 나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두 누님과 자형을 떠나 밤중을 이용하여 아버지와 어머님 곁으로 돌아와 버렸다. 비쩍 마르도록 살이 빠진 우리를 보고 어머님은 아무리 전쟁이라도 애들을 이렇게 굶길 수 없다면서 나쁜 놈들이라고 화를 내셨다.


  비행기가 무섭다고 하시며 땅굴 밑에서 불을 가리고 흰쌀밥을 지어서 달콤한 김치를 두툼하게 찢어 담고 구수한 된장국까지 끓여주신 어머니의 밥상은 우리에겐 꿈속에 그리던 천국의 음식이었다.

  형님과 나는 먹기 시합이라도 하듯 게걸스레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고 아무도 뺏을 사람이 없으니 천천히 먹으라고 타이르신다. 나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 것 같다. 그 많은 되 밥을 다 먹고 수박을 두 개나 먹었는데도 허기는 가시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내일 아침은 안 해도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사흘 먹을 밥을 한끼에 다 먹었으니 애들을 살리려거든 더 먹이지 말라 경고를 하셨다.

  
  아침이 되었다. 형님과 나는 눈을 뜰 수도 일어 날 수도 없이 통대구처럼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 몸보다 큰 도롱뇽을 삼킨 실뱀처럼, 형과 나는 맹꽁이처럼 부풀어 오른 배가 꺼져 내려갈 때까지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다음날까지 누어 뒹굴었던 것 같다.


  부모님께서는 우리를 곁에 두고 보시니 안심이 된다 하시면 서도, 인민군들이 부역을 핑계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민간인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고 있으니, 그들에게 우리가 들켜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하셨다. 


  9월 중순이 지날 무렵이다. 인민군 한사람이 따발총을 들고 나타나 총 한발을 하늘을 향에 쏜 후, 미처 숨지 못한 아버지가 밭에서 일을 하는 척하고 있는 아버지를 강둑 위로 불러 올린다. 아버지는 미적미적 시간을 끌며 올라오지를 않자 또 총을 한방 더 쏘면서 빨리 올라 오라 명령한다. 어머니와 우리는 원두막 땅굴 밑에 숨어서 이 광경을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보면서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노인 동무!”

“왜 그러시오”

“강변대밭에 숨겨둔 소가 노인동무 소지요?”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않고 천천히 둑 위로 태연히 걸어가신다.

“노인 동무! 소를 왜 숨겨두었소!”

“왜 내가 숨기겠오 그놈이 대밭으로 들어 간 것이지”

숨어서 듣고 있던 어머니는 애를 태우시며 아버지의 답답한 대답을 걱정하신다.

“우리 소가 아니라고 하면 될걸”

“니 아버지는 너무 정직해서 큰 탈이다”

인민군이 황소가 있는 대밭으로 함께 가서 소의 고삐가 풀려있는지 묶여 있는지 함께 가보자고 큰 소리로 말한다.


“노인동무의 말이 거짓말이면 이건 반동이요! 알갔소?”

“또 숨긴들 무슨 반동이요?”

아버지가 겁도 없이 천연스럽게 대꾸를 하시는 모습이 못마땅했던지 따발총을 아버지 가슴에 들이대며 더 큰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동무는 소를 숨겨두었다가 국방 군에게 바치려 한 것 아니오?!”

“그러면 당신이 먼저 몰고 가시오!”

“강변 대밭으로 같이 갑시다”


 인민군은 아버지의 등을 총열로 떠밀며 앞세워 강가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잘못하다가 아버지가 소를 몰고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으로 강둑 길 아래 밭을 가로질러 대밭으로 먼저 가보려고 애를 써도 미치지 못하였다. 아버지와 인민군이 대밭에 와보니 천운인지 다행인지 황소의 고삐가 진짜 풀린 채 대밭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풀을 뜯고 있었다.


  인민군은 아버지의 침착한 행동에 미안했던지 부드러운 말로 이 소를 몰고 함께 가지고 하였다. 그때 막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어머니는 군인아저씨동무라 부르며 차분하게 그를 설득하였다.


“이 소는 사실상 우리 소가 아닙니다”

“그럼 누구소란 말이오!”

“불쌍한 이웃 어린아이의 솝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소 주인집이 폭격을 당하여 그 부모와 할머니가 모두 죽고, 어린 아이만 살았는데 그 어린 아이도 한쪽 팔다리가 상하여 병원으로 데리고 가면서 살아 남은 이 소를 밭에 혼자 계신 노인에게 맡겨 놓고 간 것이오”

“왜 진작 남의 소라고 말하지 않았소?”

“내가 보살펴 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어찌 하겠소 노인동무가 소를 몰고 수고를 좀 해 주시오”

어머니의 설득을 일방적으로 무시하자 슬그머니 화가 치민 어머니는 다잡듯이 앞을 가로막고 대어들기 시작하였다.


“보소 인민군동무, 소도 없고 이 노인도 없으면 어린아이가 돌아오면 맡긴 소를 훔쳐먹은 나쁜 늙은이가 될 판이니, 당신이 혼자 몰고 가던지, 우리 두 늙은이를 여기서 쏘아 죽이고 가시오!”

 어머니는 큰소리로 인민을 윽박지르며, 인민을 위해 충성한다는 인민군이 인민을 죽이는 군인인가 어디 좀 보자고 하시며 대어들었다. 보통이 넘는 할머니의 살기에 질린 인민군이 뒤로 물러서는 초조한 모습을 눈치챈 어머니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영감! 돌아갑시다. 총을 쏘아 죽이던지 소를 몰고 가든지, 어서 갑시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앞세우고 뒤에 일부러 천천히 따라오면서 큰 소리로 불쌍한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시늉을 하셨다고 했다.

“보시오! 노인동무 거기 서시오, 안 서면 쏘겠소!”

  바람결에 들려오는 인민군의 힘없는 정지명령소리를 들은 어머님은 그 순진해 보였던 어린 인민군이 등뒤로 총을 쏠 것 같지는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인민군은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할 수 없이 직접 소를 몰고 대밭을 나가는 모습을 먼 곳에서 바라보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유엔군의 폭격기와 전투기가 번갈아 가며 공습을 시작하더니 자정이 가까워서야 공습이 멎었다. 아무리 간이 큰 사람도 기가 질릴 정도로 무서운 공습이었다. 들도 산도 시내도 온통 쑥밭이 되어 버렸다. 고향의 아름다운 풍광은 그때에 그의 다 부서지고 아름답던 섬진교도 세 토막으로 잘려 버렸고 섬호정도 이때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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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저녁 형님과 내가 물도랑에서 잡아온 피리 붕어를 다듬으면서 나는 아버지에게 인민군이 몰고 간 소가 누구의 소인지 물어 보았다.

“그 소가 우리 솝니까?”

“니들 큰 자형소다”    

“그 소가 어디 있다가 나왔습니까?”


  아버지는 무책임한 큰 자형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두서너 달 전에 비리 먹어 금방 죽을 것 같은 소 한 마리를 질질 끌고 와서 ‘이놈이 남해로 갈려면 몇 일 쉬어야 할 것’이라며 구례, 남원을 다녀와서 몰고 가겠다고 하면서 나에게 맡겨두었다.


  전쟁 난다는 소문에 너의 자형은 남해로 바로 가버렸다. 흑간에서 금방 죽어 가는 놈을 술과 약초를 먹여 두 이래를 치료하여 가까스로 기운을 차리게 한 뒤에 어두운 밤에 조용히 몰고 나와 낮에는 대밭에 숨겨 소의 기를 살리고 밤에는 원두막 아랫바닥에 짚단을 깔아 따뜻이 잠을 재웠다. 우리는 그 황소 발 밑에 땅굴을 파고 숨어살았다.


  니 큰 자형이 구례로 가면서 병든 그 소가 이틀을 넘기지 못할 것을 알고 갔단다. 내가 살려내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보다 더 유명한 소의 명의라 하면서 그 소를 나에게 선물로 넘겨주었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하필 병든 소를 선물하여 큰 고초를 겪게 했다고 하시며, 어떤 경우든 어른을 시험하는 자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도 그 황소를 살리시려고 정성을 들었던 이야기를 하시다가 아버지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괜스레 우리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황소가 참으로 우리와 운명을 같이한 귀한 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이다. 아버지가 밖에서 어머니와 우리를 부르시며 어서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귀에 익은 황소의 울음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우리가 잠든 후에 그 황소가 코뚜레만 단 채 원두막을 제집처럼 찾아와 잠을 잔 것이다. 그렇게 무서운 공습 속에서도 살아 도망쳐 돌아온 우리 황소가 이처럼 햇빛이 아름답고 신기한 아침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젠 공습도 없고, 국군도 인민군도 보이지 않는다. 구월이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노 오란 가을이 부끄러운 듯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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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을 탈환하고 삼팔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한다는 라디오 방송이 여기 저기서 들린다. 초등학교에서 4학년이상은 모두 등교하라는 소집통지를 받고 나도 학교에 갔었다. 운동장이 폭탄으로 온통 웅덩이가 되어 달나라의 분화구처럼 되어있었다. 교실 벽과 담벼락은 온통 비행기의 기관총 탄흔으로 구멍이 빈틈없이 뚫려진 것이 꼭 탈곡기를 둘러싼 동글동글한 구멍이 뚫린 철판덮개와 꼭 같다는 생각이 났다.


  우리는 가마니에 대나무를 끼어 만든 단가로 친구들이 퍼 담아주는 흙을 날라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한지 일주일이 지나자 운동장이 평평해지는 것 같았다. 이북에서는 지금도 이때 우리가 했던 모습으로 전투니 돌격이니 하면서 노동하는 뉴스화면을 볼 때 참 슬퍼 보인다.


  요즈음 우리 같으면 포크레인 한 대면 하루에 끝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군이 기계공병으로 너무나 쉽게 비행장이나 군수도로, 군대의 주둔지를 쾌속 안전제일로 조성하여 병력의 노동손실을 획기적으로 줄이기 때문에 그 기동력의 막강함이 전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수호의 이름으로 유일한 세계경찰국가의 임무를 맡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