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이야기

                                                     이 진 원  

  우정의 잉태
  <올챙이와 미꾸라지>

   대여섯살 꼬마 너댓명이 진흙이 묻을까 염려하여 웃통과 바지를 전부 벗어 멀찌감치 벗어 두고 알몸으로 지금은 하동시장이 되어 있는 물도랑에서 수벵이(왕잠자리)를 잡는다고 낙 채를 돌리는 놈, 붕어 송사리를 잡는다고 온몸에 뻘을 묻힌 채 손을 저으며 고기를 모는 놈, 어떤 놈은 고랑을 막아 고무신짝으로 물을 퍼내고 잡은 붕어 송사리는 고무신에 맑은 물을 담아 넣어둔다. 네 것 내 것 하며 가지런히 모아 둔 검은 고무신짝이 나란히 불어난다.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후텁지근한 구름냄새가 가슴팍에 밀려오더니, 주먹만한 빗방울이 이마와 어깨에 후드득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어떤 것은 따뜻하고 어떤 것은 소름끼치도록 차다.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전부 뒤덮었는데 '너뱅이 들' 끝자락 하저구 하늘만 구멍 뚫린 듯 하얀 점 구름사이로 번갯불들이 숨바꼭질을 하더니,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듯 쏟아지는 소나기에 벗어둔 옷과 고무신들이 송사리를 실은 채 모두 떠내려 가버렸다.

  뻘 죽이 된 팬티를 입었던 몇 놈도 모두 발가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어둑한 날의 소나기를 이용하여 섬진강으로 가서 목욕을 하고 옷을 씻어 입을 양으로 목넘어로 달려가는 중에 지금의 하동읍사무소 앞까지 뛰어오자 갑자기 비가 멎고 햇볕이 쨍쨍 나버렸다.

  모두가 고추를 손으로 가린 채 엉금엉금 뛰어가는 우리를 보고, 지나던 어른들이 요- 매사니(형체가 없는 메아리의 요정)놈들 모두 잡아다 꼬치를 따야지! 하며 뒤를 좇아 딸아 오는 시늉을 하기도 한다. 그때의 기억으로 참 존 김 회장이 우리의 우두머리로 기억된다.

  가까스로 집에 돌아와 몰래 우물을 퍼부어도 머리털과 바지저고리에 파묻힌 진흙 뻘은 물감처럼 잘 씻어지지가 않는다. 결국 어머님과 누님들에게 발각되어 종아리에 실핏줄이 서너 개 생긴 후에야 편안하게 새 옷을 갈아입고 밥을 얻어먹게 되었다.    

   1945년경 해방이 되던 해를 기억한다. 소전머리(우시장)서쪽 끝자락에 산업조합이란 이름이 붙은 일본회사가 있었고, 6. 25 동란이 일어난 후에는 조흥은행 하동지점으로 사용되었다. 여섯째 누나가 그 은행에 다니던 김씨와 결혼을 하였는데 집은 남당 이었다.

   그 산업조합관사에 정회경이가 살았다. 회경이 부친께서 산업조합건물과 정미소, 창고 등의 관리책임을 맡고 계셨다가, 해방이 되고 일본적산재산을 처리할 때 불하를 받아 정회경이 부친의 재산이 되었다. 해방 전에는 산업조합에서 손잡이에 금실이 달린 일본도를 찬 일본헌병 앞에서 막내누님과 함께 배급을 몇 번 탔던 기억이 난다.

   회경이 부친은 합천 군수를 지내셨고 우리아버지와 같은 연세였다. 아버지는 경이 아버지처럼 사심이 없는 공직자들은 일본사람이든 조선사람이든 상관없이 존경을 받는다고 하시며 항상 정 군수를 칭찬 하셨다. 정장을 하신 신식만도 차림의 회경이 부친을 좁은 들길에서 만나 인사를 드릴 때면 나의 머리를 만지시며, 구용이 아버지는 오줌장군을 지신 훌륭한 선비라 하시며, 효도해야 한다고 하셨다.

  회경이 부친은 아버지 보다 언제나 더 젊고 멋진 점잖은 신사이셨다. 회경이 어머님은 우리어머님보다 한 살 적으셨고, 형 동생하며 서로 다정하게 지내셨다. 회경이 집은 일본식 주택이라 마루가장자리에 유리문이 다 붙어있고 변소가 집안에 있었다. 그 당시에는 편리하다는 생각보다, 뒷간이라 하여 집 뒤에 떨어져있는 집에서 살던 습관이 되어 선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경이집 뒷 마당 탕자나무 울타리 넘어 신휘자의 집이 있었는데 하동막걸리로 유명한 술도가였다. 바람이 휘몰아부는 날이면 숙익는 냄새나 막걸리 글러는 술내음이 배곱픈 어린 나의 콧등에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휘자 부친의 성함은 신삼우씨라 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처음의 술도가 주인인 고씨가 썩 좋은 평을 듣지 못하여 사업이 사양 하였는데, 동란 직전에 휘자 부친이 술도가를 인수하여 호탕하고 임심이 좋은 덕으로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다.

  회경이 집앞 길건너 언덕에 크다란 굴뚝이 높이 솟아있고 마치 큰 별장이나 궁전 같은 집이 있었는데 이곳이 이길례의 집이다. 하동정종으로 유명한 정종도가다. 아침 등교길이면 어김없이 담벼락의 큰 하수구에 정종도가에서 흘러 나오는 김이나는 따뜻한 폐수에는 향긋한 청주냄새가 상당히 진하게 났다.  어느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길례집에 들러 얻어온 달콤한 정종찌꺼기를 먹고 취하여 하늘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걸핏하면 놀러 가는 곳이 회경이 집이었다. 겨울이면 방앗간 마당에서 참새도 잡고, 가을이면 앞마당 감나무 밭에서 단감을 따먹기도 하고, 정미소 안이나 쌀 창고 안에서 쥐틀로 쥐를 잡기도 하고, 방앗간 뒤 탱자나무 울타리 밑에서 바지를 홀랑 내린 채 소변을 보면서 누구고추가 큰지 재어보기도 하면서, 종일을 보낼 때가 허다하였다.

  우리 집은 소전머리 입구에 있었는데 상당히 큰 한옥겹집이다. 산청 사는 정 목수라는 분이 우리 집을 지은 후 둘째 자형이 되셨다. 그 누님의 첫째 딸이 바로 동창인 정 점숙이다.

  어머님과 둘째 누님이 같은 해에 아들, 딸을 각각 본 셈이다. 나는 팔 남매 중 막내로 새로 지은 우리 집에서 어머니가 용 아홉을 보고 태어났다하여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를 구용이라 불렀다.

  새집이 넓고 방이 많아 남해에 살고 계신 제일 큰 자형이 소 떼를 몰고 하동 시장으로 오면 일행들과 몇몇 친구10여명이상이 우리 집에서 이삼일 머물렀다가 다음 장을 찾아 광양, 구례, 남원, 거창, 함양, 산청, 하동, 남해 등지를 순회하며 현지에서 건강한 소를 팔고 병약한 소를 헐값으로 사들여 남해에서 자연요법으로 소를 치료하여 건강해진 소를 만들어 다시 오시기 때문에 소의 신의라고 하여 실제이름도 김'소진구'(김남구)라 부르셨다.
   그때 불법여관을 한다는 풍문이 있자 어머니께서 자형을 위해서 여관 허가를 내었고 이름을 <광양여관>이라는 미니 여인숙을 경영하시게 되었다.  

  새로 지은 우리 집 뒤로 세 번째 집이 이 선수(이삼철) 집이었고, 선수 식구들은 결혼한 두 누님들 가족과 함께 살았다. 그래 선지 언제나 웃음소리와 가무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큰 자형은 이북 사람으로 멋쟁이이셨고 둘째 자형은 읍내에서 손꼽히는 이발사였다. 선수 어머님과 우리어머님은 남들보다 더 다정히 지내신 것은 합천이씨 종친이기 때문이라 하셨다.

  선수는 생일이 우리보다 일러 나이 많은 친구처럼 어른스러웠고, 형님을 도와 일을 배운 탓으로 어렵고 힘든 일을 잘 해내었다. 우리들에게 어려운 일이나 힘든 일이 생기면 선수를 찾아가면 멋지게 해결되곤 하였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이름을 이 삼철 이라 불렀다.
  지금은 넓은 복개도로가 되어버렸지만 선수 집 뒤로 하동천이 흘렀다. 장마나 홍수가 나면 이 하동천이 범람하여 중앙시장 통이 침수되기도 하였다. 이 하동천의 하류가 갈라져 일부는 우리들이 붕어와 송사리를 잡았던 냇 고랑이되 수 문을 통하여 너뱅이 들로 들어가기도 하고,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길옆을 따라 섬진교 밑으로 흘러 들어갔는데 지금은 水門만 붙어있는 복개 하수구가 되어 그 위로 자동차가 다니고있다.

  소전머리 안자락에는 한식유곽처럼 겹 대문으로 지어진 큰 한옥이 있었는데 이곳이 이 태량(상구)집이었다. 태량이 부친은 그 당시 이름난 기업중개인으로, 요즈음 기업 M&A나 기업사채(hot-money) 투기자본가였다. 언제나 풍부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았고, 그 당시 승마를 취미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부호였다.
  어린 상구를 왕자처럼 큰 적토마에 태우고 장비 같은 장군이 되라고 하시기도 했다. 태량이 아버지가 친히 마부처럼 직접 말고삐를 잡고 끌어주시며 우시장을 돌거나 시내를 한바퀴 돌아 주시는 모습은 참으로 부러운 광경이었다.

  우리집앞 길 건너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회사 ; 아버지는 늘 도적회사라고 말씀하셨다) 하동지점이 있었고 큰 창고와 넓은 마당은 도둑고양이 천국이었다. 누구도 그곳에서 들어와 놀지 못하게 하였다. 일본식 석축으로 높게 담을 쌓아올려 외부사람이 쉽게 접근하기 어렵게 하였고 뒷산언덕에는 철조망으로 튼튼하게 울타리가 처져있었다.   마치 요새처럼 침입자를 관망하기 좋게 성축한 주도면밀한 설계였던 것임을 지금 깨닫는다.

   동척회사의 사무실 입구는 계단으로 세워지고 철문 양 기둥 위에는 수박 등을 설치하여 전형적 일본 공관의 권위를 살려내고 있었다. 창고에 수탈한 식량을 실어 나르는 차량진입 문 앞에 경비실이 있었다.
  그 경비실 근처에 빨간 양철지붕집에 김홍광이가 살았고, 육이오 동난 직전이거나 직후에 남당으로 이사를 하여 엿 공장을 했는데 '남당엿'이 한때 하동명물 중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지금의 하동초등학교 강당이 있는 곳으로 생각된다.

  이사가기 전 김홍광 집 옆 한길건너 전형적인 일본식 사각형 이층유곽으로 우뚝 솟아있던 목조건물에 일본부호가 살았는데, 6·25동난 후 악양 정동부락에서 부자로 살던 김춘자 부모님이 이 집으로 이사를 와서 창원여관을 차리셨다. 창원여관 문 앞 길 건너에 하동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관사가 있었다.

  창원여관 옆길을 들어서서 바로 올라가면 강덕운의 집이 언덕에 있었고 부친은 온순하신 어른으로 생기몰(생기마을의 고어로 해가 먼저 뜨는 마을을 지칭한다 : 동교동)이장을 오래 맡으셨는데, 인근 사람들도 상담할 일이 생기면 강구장을 찾아 부탁할 정도로 친절하게 일을 처리하여 주셨다. 덕운이 부모님도 우리부모님 같이 아버지께서 과묵하신데 비해 어머님은 활 수 이셨다. 나는 덕운이 집에 자주 놀러가 새와 토끼도 함께 기르며 놀았다.

  덕운이 집에 가기 전에 오른쪽 샛길로 들어가는 길 끝에 이숙자집이 있었다. 덕운이 집 담벼락 절벽아래 이숙자(점덕)의 하얀 양철지붕이 보였고 대청마루나 방에서 숙자가 어머니께 꾸중을 듣거나 변명하는 소리를 엿듣기도 했다. 우리가 엿듣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청마루를 가리고 창문도 닫아 버렸다. 동난 후에 우리가 송사리를 잡았던 개울연못가 근처에 멋쟁이 아저씨로 소문난 이 숙자 부친께서 철공소를 지어 기계를 제작하셨고 이 숙자 집도 그 공장 근처인 정 후자 집 옆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 숙자가 살던 길 건너 앞쪽에 동란 후 폐허가 된 신 시장입구에 목 넘어 살았던 정진일 가 이사를 하여 <백설당>이라는 얼음과자공장을 크게 하였다. 그 이전에는 하동읍에 <밀림>이라는 얼음 과자 공장이 있었는데 밀림은 팥으로 만든 얼음 과자가 유명했고 백설은 우유와 향신료로 담백하고 깨끗한 맛으로 인기가 높았다.  

  숙자가 살던 뒷집이 정 후자 집이었고 후자 집 옆 한길건너 오 정성이 살았다. 정 후자 집에는 어머님과 할머니 언니와 동생이 살고 있었는데 후자 집을 중심으로 한 블록을 차지할 정도로 넓게 지어진 일본식 건물들은 모두 정 후자네 집이었다.      

  정 후자 집 앞으로 두 블록을 지나면 정 덕기가 살았는데 부친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음식점이름이 '송월관'이라 하여 읍내서 제일 큰 식당이었다. 덕기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자기주장을 설득하는 근성이 있어서 친구들이 모두 양보를 하여주는 바람에 저절로 꼬마대장이 되어버렸다.
 요즈음 애들 말처럼 깡다구로 왕초노릇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덕기는 여간해서 힘이나 물리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려하거나 도전하지 않는 영리한 기지가 분명히 있었다. 그래 선지 덕기가 무섭다기보다 오히려 남을 귀찮게 구는 친구라고 여기는 친구들이 많았다.

  다같이 어린데도 덕기는 믿음성 있고 설득력 있는 화술로 상대를 제압하는 능력이 어딘가 있었다. 덕기는 이러한 자신감을 유지하기 위해 책도 많이 보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 내게 말한 적도 있었다. 친구와의 약속도 잘 지키면서 신용을 얻으려고 노력한다고도 하였다.
  이렇게 친구들을 설득하거나 특이한 카리스마로 굴복시켰던 유능하고 똑똑한 덕기가 자기와는 정반대의 행동으로 친구들에게 다정하게 양보하고 도와주는 김광석이가 더 인기가 높아지자 끝까지 참아온 물리적 도전으로 공개결투를 선포했다가 큰 낭패를 당한 후, 나를 찾아와 자기가 친구들에게 너무 귀찮게 했다고 사과를 하던 솔직한 친구였다. 멋 적게 웃으며 앞으로는 서로 잘 지내자고 하던 검은 눈썹에 맑고 큰 눈의 어린 영웅이 철들어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 참으로 보고싶다.

  이선수집 뒤 하동천의 나무다리를 건너면 시장 통 안에 이홍충 집이 있었다. 홍충이 아버지는 시장 안에서 큰 비로드방적공장을 경영하시면서 방적기계를 설계하시거나 제작하여 팔거나 사오시고 수리하시는 요즈음의 벤처산업 기술자였다. 주로 고급융단(비로드)을 생산하는 기계의 전문가이셨다.

  집에서는 큰 담배포를 경영하시는 어머님과 누님이 계셨다. 홍충 이도 막내아들로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 언제나 여유 있고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친구들이 모여 놀이를 하면서 돈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인색하지 않게 홍충이가 그 책임을 스스로 맡았다.
  키도 크고 힘도 세고 유머가 있어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항상 앞장서서 선봉장노릇을 자진했던 매력은 김 광석 이와 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두 친구가 사업에도 성공하여 지금도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고 있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두 친구들의 이야기에 너무나 어울리는 듯 하다.

  이홍충이 집에서 두 블록을 건너 이광남 집이 있었다. 부친은 발동기 전문 기술자였다. 요즈음의 내연기관에 해당되나 그 당시에는 모든 선박과 동력장치가 이 발동기를 사용하였다. 우리집근처의 진양철공소를 경영하던 제성근씨는 발동기의 고장 원인을 모르면 최고의 기술자인 광남이 부친을 초빙하여 고치셨다.
  제성근 씨는 한량으로 일본식 고적을 잘 부셨는데 어떤 때는 가슴이 울리는 연주를 하시기도 하였다. 광남이 부친은 말없이 기계를 고치면서도 자기자랑을 않으시는데, 제성근 씨가 오히려 자가와 광남이 아버지가 경남과 호남의 발동기 전문기술의 쌍벽이라고 말하면서 치켜세워 주시기도 하였다.

   광남이 부모님은 원래 전남순천에서 여·순 반란사건이후 하동으로 이사를 온 것으로 기억된다. 광남이 어머님은 친구들 어머님 중에서 제일 젊고 고우신 분으로 생각된다. 광남이는 철공소에서 나와 자주 만나 함께 기계공작에 재미를 붙여 노는 바람에, 장난감이나 도구를 잘 만들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손재주가 생겨났다. 내가 상선선박의 고급 해기사가 되어 20년을 바다에서 청춘을 보내게된 연유가 이것과 무관하지 않은 엄청난 각인으로 생각된다.  

  이광남 집 앞 한길을 건너 윤 방자 친구 집이 있었다. 안집 살림은 동교동 향교 앞에 할머니가 계셨다. 어머니는 방자 할머니를 형님이라 불었다. 방자의 부친은 활달한 성격에 남을 도와주는 일에 적극적이셨고 매사에 경우를 올바르게 밝히시는 데는 일가견이 계신 옹고집이셨다.

  신 시장 통에서 윤 용주라 하시는 함자를 모르는 분이 없었다. <식료품상회>라는 간판으로 읍내에서도 제일 손꼽히는 식료품도산매를 겸한 것은 요즈음의 대형 할인 슈퍼마켓이었다. 방자의 둘 째 삼촌은 전국의 자전거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한 한국선수권보유자였고 인물도 잘생겨 인기가 참 높았고 스포츠맨으로 우리들의 추앙을 받으셨다. 방자의 막내 삼촌인 윤 은채도 나와 점숙이 같이 숙질간으로 한집에서 살면서 학교를 같이 다녔던 동기동창이었는데 윤 은채는 초등학교는 한해 선배였으나 중학교에는 같이 입학하였다.

   윤방자 의 집 뒤편에 하동전매지청이 있었고 그 관사에 꼭 여자 같이 다정한 중성의 친구 정광호가 살았다. 말을 걸어 친구들에게 부탁을 할 때에도, 여자 친구들 보다 더 다정하였다. 그러나 정 광호를 여자 같다고 우습게 보는 친구는 하나도 없었고, 서로 광호와 친해지기를 경쟁하여 친구들끼리 시기하는 일도 가끔 생기기도 하였다. 광호가 나더러 글을 잘 쓴다고 작은 숙제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면 더 기분이 좋았고, 내 일을 미루면서 광호 숙제부터 해주었던 일이 몇 번 있은 것 같다.

  운동회 때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 팔을 곁에 붙인 채 달리는 모습이 여자아이 같았으나, 그래도 나보다 더 빨리 잘 달린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반에서 릴레이 선수가 되지 않았는데 광호는 선수로 뽑힌 일이 더러 있었다. 대학을 다닐 때 가끔 만나면 변성을 하여 남자의 목소리로 말을 했으나, 친구 마음과 행동은 착한 여성의 심경을 벗어나지 못했고 어쩌다 친구들과 함께 한방에 잠을 잘 경우에는 더욱 여성다운 우정을 표현하면서 성전환을 하여 여자로 살고싶다는 하소연도 한일이 있었다.

  마음씨가 천사 같이 순순하고 어진 광호가 차라리 여자로 성전환을 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였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개방된 이해를 갖지 못했다. 정광호가 우리보다 운명을 일찍 달리한 배경이 시대를 잘 못난 슬픈 요정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요즈음 매스컴을 타고 '하리수'가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정 광호를 친구를 떠올리며 어릴 때를 생각나게 만든다.

  정후자집 앞에서 몇 명의 어린 여학생들이 왼쪽가슴에 흰 손수건을 달고 학교 등교를 위해 나란히 줄을 서서 출발하여 정회경이 집 앞에 오면 기다렸던 우리도 그 뒷줄에 붙어서 한 줄로 좌측통행을 하여 등교를 했던 기억이 새롭다.
  북한은 지금도 이렇게 등교를 하고있는 어린 초등학생의 모습이 60년 전의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