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동학과 지금의 천도교

웅암 이진원

1. 그리운 부모님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동학이나 천도교에 대한 말씀을 듣지 못했다. 다만 삼경이 되면 부드럽게 주문을 외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아마도 삼칠자 주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낭송이 신비하게 여겨진 것은, 매사가 어김없이 이루어지는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었다.

  철없이 저지른 나의 모든 일을 숨길 수 없었다. 순간의 모면이 조용하신 아버지의 웃음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어른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꾸지람을 들어 본 일이 없다. 다만 어머님의 회초리는 피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친구의 잘못을 묵인 하는 우정은 그 친구를 망치게 하는 악한 의도가 된다고 하셨다.

 옳지 못한 일이나, 배려하지 못하는 일을 지적하는 용기는 만용이 아니라고 하셨다. 나의 급한 성정이 실 수를 하면서도 부모의 말씀을 거역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를 거역하는 일이 되지 않도록 배려를 해주신 것이다. 시키는 일을 어기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거역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의견을 물어 나의 자율적 결정을 인정해 주셨다. 자의적 약속을 지켜 신뢰를 쌓도록 하셨다. 맡은 일은 정직하게 끝을 맺도록 유도 해 주셨다. 약속을 정직하게 지키는 올바른 일은 한울님이 돕는다고 하셨다. 부모님은 전능하신 시통력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 알았다. 내가 남을 현혹하지 못하는 것은 부모님의 일상이 각인된 때문이다.

  나는 동학을 믿는 사람은 부모님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먼저 노력하고 미래를 위해 공동의무를 실천하는 진리가 동학이다. 동학은 세상을 개벽하여 지상천국을 만들수 있는 정직한 믿음이라는 공감을 남겨주셨다.

  망구가 된 지금까지 변명이나 책임회피를 하지 않았다. 20년동안 선박사관으로 일하면서도 동료에게 일방적 명령이나 지시를 해 본 일도 없다. 협의 결정한 약속을 이행하도록 유도했을 뿐이다. 공동의무를 어길 때의 혹독한 책임을 지게하는 것은 전체의 생명을 위한 일이다.

   요즘의 가정은 가장의 의무이행이 가족의 책임회피수단이 되고 있다. 이렇게 잘못된 습성이 길들여진 것도 가장의 책임이 되었다. 부모의 올바른 생활모습이 가족에게 각인되지 못한 책임이다. 가족은 변명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가장은 그들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이 도량과 능력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때문이다.

 인간이 한울님과 동귀일체가 이루어질 때가 천국을 얻게된다. 우리가 앎을 찾아 그대로 실천했을 때 앎을 얻는 것이다. 죄를 짓고 조금도 반성을 못하는 천도교인을 만들어 낸 사람들은 바로 기득권을 가진 교직자와 그 추종자들이다. 나를 신뢰하는 이웃이 이런 교도가 될까 두려워 자퇴를 하고 이 글을 쓰게된 것이다.

인생의 황혼이 정직해 지는 것(종심)은 배려의 배반을 인정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의 약속이며 인간이 자초한 귀결이다. 사람이 한울님에게 약속한 것을 지킬때 얻는 보응이 지상천국이다. 약속을 지킨자에게 안락을 누리는 종생을 보은하는 것이다. 부모를 한울처럼 섬기는 모습은 그 자식들에게 각인시킬 때 황혼의 배반은 당하지 않는다.

 부패한 공룡행정제국의 개혁은 동학의 부흥이 적합한 방편이다. 한울님의 감응으로 2005. 11. 11. 11:00 (포덕 146년) 도암을 만나 안개속의 동학군 위령제(하동 옥종 부방)를 처음 보게 되었다. 꿈에 보았던 조부모님의 신비한 동학을 실감했다. 민족얼의 개혁을 보듯 시달린 삶도 존중 받을 때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일었다. 우리나라가 지상천국이 될 수 있는 根坤임을 암시 하는 것 같았다.

   『천도교』의 종지가 동서양 철학자들이 주장한 진리를 모두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의 고전과 동서양의 철학사상과 이념 요지를 열거해 본다. 일부 교도의 비판을 받을 수 도 있다. 나의 글을 인용용하여 박사학위를 받는 교도도 있다. 만인의 종교를 수용하겠다는 천도교의 이념에 부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기독교의 '세레요한이 후발의 예수를 세레로 영접하는 형국'과 비교해보면 오히려 이보다 더 위대한 대신사님의 영적과 동경대전의 탄생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시대와 먼 세월을 일각으로 묶어버린 간단한 말씀이『천도교경전』에 있다.

 

2.『천도교경전』과  동·서양 철학관

  동경대전은 문학적 가치로도 신뢰가 있다. 금오신화를 비롯한 모든 우리의 고전문학도 중국 문호들의 고전문학도 모두 녹아 있는 사실을 알게된다. 용담유사는 한말의 가사로 지금도 노래불려지고 있다. 대신사께서 방물행상으로 방황하셨던 시련은 석가, 예수, 공자, 마호메트와 다를바 없다.

 용담으로 돌아와 득도 하실때 까지 철학과 문학을 학습하지 않으셨다. 인간 만세의 철학을 자연섭리로 본 듯이 한울님의 감응하심으로 창도주가 직접 기록하여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남기신 것이다. 계명을 받은 모세와 너무나 닮았다. 『천도교경전』은 유일을 주장하는 배타성이 없다. 모든 경전은 구전되어온 종교체험을 본인이 아닌 후대들이 남긴 기록이다.

   천도교인들이 경전의 의미를 멋대로 도식하고 있는 것은 슬픈 일이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장사치의 근성으로 책임회피와 변명수단으로 악용하고 있으니 대신사의 순교가 통절하다. 용담정의 수련일주는 가슴메인 눈물만 흘리고 돌아 왔다. 탐욕과 독선으로 배려를 모르는 교도들의 모습이 나를 슬프게 하였다.

2.1 한국사상

  1)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의 「종체(宗體)를 나타냄」에서
       '대개 대승의 본체는 고요하여 적막하며, 깊어서 그윽하다. 깊고 깊으나 어찌 만상의 밖을 벗어나겠으며, 고요하고 또 고요하지만 오히려 백가(百家)의 말 속에 들어있다. 만상의 밖을 벗어나지 않았으나 오안(五眼 ; 모든 법의 事·理를 관조하는 다섯 가지 눈. 곧 肉眼, 天眼, 法眼, 慧眼, 佛眼)으로 그 몸을 볼 수 없고 말 속에 있으나 사변(四辯)으로 그 모습을 말할 수 없다. 크다고 하고자 하니 안이 없는 것에 들어가도 남김이 없고 작다고 말하고자 하니 밖이 없는 것을 감싸고도 남음이 있다.' 와 같이 원효의 종체 즉 천도교의 종지라고 할 수 있는 심법을 표현 한 요지다. 열면 무량무변의 뜻을 근본으로 하고 합치면 일심을 핵심으로 한다. 모든 것이 마음의 작난이라는 것을 크게 깨달은 것은 천도교 사상의 수심정기와 다를게 없다.

  2) 일연의『삼국유사』는
      몽골의 30여 년에 걸친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굴복한 시기에 저술 된 역사책이다. 그러므로 민족의 위기를 맞아 구국의 정신을 고취했던 정신사관을 보여준 것은 패망 직전의 한말에 구국을 위한 대신사님의 동경대전의 저술과 이념과 다르지 않다.
  서문에서  '이세상 어느곳이 진향(眞鄕)아니랴마는 향화(香火)의 인연은 우리 나라가 으뜸이라. 아육왕이 손대지 못할 일이 아니라 월성(月城)옛터를 찾아온 것이로다.'라고 한 말은 마치 용담으로 돌아오신 대신사님의 이야기와 같은 생각이다.

  3) 정도전의 『삼봉집』권9. 경제문감 재상지직(宰相之職)에서
     위로는 음양(陰陽)을 조화롭게 하고 아래로는 서민을 편안하게 하며, 안으로는 백성을 밝게 다스리고 밖으로는 오랑캐를 진정하고 무마하는 것이니 국가의 포상과 형벌이 여기에 관련되며 천하의 정치와 명령이 여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경전의 바른 덕치를 그대로 표방한 듯 하나 동경대전보다 수세기를 앞당겨진 글이다. 경전의 예와 오늘이 다르지 않다고 하신 말씀이 아닌가.

   4) 이황의『성학십도』와 이이의『성학집요』
        성학십도의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에서
       ' 理와 氣를 겸하고 性과 情을 포함한 것이 마음이다.  성이 발현해서 정이 될 때가 곧 마음의 기미(幾微)인데, 이는 온갖 변화의 중심이며 선악의 분기점이다. 敬의 태도를 유지하는데 전념하여 天理와 人欲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몸소 주의 해야 한다. 마음의 존양과 발동의 성찰 습관 등'의 심법은 동학의 심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성학집요의 修己편의 窮理장에서는
       ' 理氣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고 할 수 있다. 理와 氣는 혼연일체로 처음부터 분리할 수 없으므로 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비록 분리할 수 없다 하더라도 혼연한 가운데 뒤섞이지 않아 한가지라고 할 수도 없다. 이는 형체가 없지만 기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고 한 것은 바로 천도경의 이기와 다를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5) 허준의『동의보감』「내경편」'신형정부도: 허준의 인간론' 에서
     ' 하늘에 일월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안목이 있다. 하늘에 주야가 있으며 사람에게 오매(寤寐)가 있다. 하늘에 뇌전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회로가 있고 하늘에 우로가 있으면 사람에게는 눈물이 있다. 하늘에 음양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한열이 있고 땅에는 천수(泉水)가 있으며 사람에게는 혈맥이 있고 땅에 초목과 금석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모발과 치아가 있으니 이러한 것은 四大, 五常이 묘하고 아름답게 조화되어 성립된 것이다.' 란 표현은 시천주를 극명하게 증명하는 동경대전의 포덕진수와 통한다.

  6) 정약용의『목민심서』4편 「애민」에서 '천하에 가장 친해서 의지할 데 없는 것도 소민이요, 천하에 가장 높아서 산과 같은 것도 소민이다' 란 비유는 귀천을 가릴 수 없는 인내천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왕이 백성의 녹으로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경전의 도리를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7) 최한기의 『기측체의』서문에서
       神氣는 실제적 이치의 바탕이요 추측은 지시을 넓히는 요법이다. 그러므로 이 기에 연유하지 아니하면 탐구하는 것이 모두 허망하고 괴탄한 이치이고, 추측에 말미암지 아니하면 안다는 것이 모두 근거가 없고 확인할 수 없는 말일 뿐이다.
      천지를 알 수 없으면 기를 알 수 있는 자는 없다. 기를 알 수 없으면 이를 알 수 있는 자는 없다. 기를 알 수 없으면서 이를 알 수 있는 자가 있었단 말은 결코 들어 보지 못했다. 이렇게 최한기는 우주 만물이 기로 이우어졌고 인간도 그 가운데 한 존재인데, 인간은 신기를 가지고 있어 이것을 통하여 우주와 교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신기는 전통적으로 마음이라는 개념이라 했다.  천도교 이기설을 그대로 통하고 있다.

 

2.2 동양사상

  1)『주역』은 동경대전의 발생 연원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신사께서 영부를 받을 때의 게시가 주역의 관통이라는 믿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물론 경전에 주역의 원천을 대신사께서 말씀 하셨다.
   '역경'의 본문에 "역에는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兩儀를 낳고 양의가 四象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았다"고 밝힌다. 여기서 태극이란 우주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본체로서, 천지가 아직 분화되기 이전의 혼돈 상태를 지칭한다. 이 태극이 분화되어 음과 양이 되니 이것을 양의라고 한다. 단지 상징적으로 볼 때, 천지가 음양이고 더위와 추위가 음양이며 밤과 낮이 음양이고 생사가 음양이며 남녀가 음양이라고 한다. 이는 우주 만물의 구성을 개념적으로 구분한 것이며 양의를 교차하여 太陽·少陰·少陽·太陰의 넷으로 변화하니 이를 四象이라고 하며 서로 바뀌는 원리를 나타낸다.

  2) 공자의 『논어』의 학이편에서
     지헤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사람은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나 어진 사람은 조용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워하고 어진 사람은 천수를 누린다. 는 명제들은 사실상 천도교의 실천궁행의 요점이 된다. 그러나 앉은뱅이 산직이 같이 10조를 뒤집어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 천도교의 현실이다.

  3) 노자의 『도덕경』에서
    '도는 無이면서도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훌륭하게 이롭게 하면서도 투쟁하지 않는다.' 는 천도교의 도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창조적 힘으로서의 자연은 자발적 힘이다. 그러므로 도는 "생산하되 소유하지 않으며 활동하되 자랑하지 않고 성장하게 하되 지배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연적이고 능산적인 힘, 즉 도의 창조적 능력을 '현묘한 덕'이라고 한다. 이것은 경전의 포덕문을 총칭한 무위이화를 표현 하는 뜻이다.

  4) 사마천의 『사기』에서
   요즘에도 법도에 어긋난 행동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만 골라서 하면서도 일생을 편안히 살 뿐아니라 그 부귀를 대대로 계속 누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땅을 가려서 밟고 때가 되어야 말을 하며 사잇길을 가지 않고 공정한 일이 아니면 발분하지 않으나 재앙을 만나는 사람이 이루 혜아릴 수 없이 많다. 나는 심히 당혹을 금치 못하겠다. 도대체 이른바 천도라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이가?

   논학문에서 대신사님께서도 대답을 해 주시지 않았던 말씀이다. 존경하되 멀리 하라는 말씀이셨지만 이런 사람이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알 수가 없다고 하셨다. 바로 지금의 천도교인이 저지르고 있는 과오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한울을 무서워 하지 않는 까닭이며 재앙을 부르는 종말의 초혼이다.

  5) 왕수인의 『전습록』에서
     "마음이 곧 이치니 천하에, 마음밖에 일이 있을 수 있겠으며 마음 밖에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지행합일론은 마음의 움직임이 곧 理의 구현이라는 생각에서 나왔다. 그래서 앎이란 실천의 시작이며 실천이란 앎의 완성리고 했다. 바로 천도교인 들이 실천궁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한울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진실과 상통한다.

 

2.3 서양사상

  1) 플라톤의 『국가』에서
      올바르고 완전하게 선한 국가는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정의의 덕을 가진다. 플라톤은 정의로운 국가와 정의로운 개인이 모두 같은 덕을 근본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정의'는 각각의 계급이 자신의 직분을 완수하고 자기의 것 이상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다른 덕을 성립시키는 가장 중요한 덕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인간은 자족적이지 않고 많은 것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모자란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국가가 건설된다. 라고 한 것은 의암성사법설의 바른 국민과 바른 국가론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2) 아르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윤리학』의 제2권에서
     '사람이 선하게 되는 길은 오직 하나로되, 악하게 되는 길은 여럿이니라!'로 말했다. 경전의 성범설을 어찌 이토록 간략하게 포현한 것일까 싶다. 지금의 천도교인은 오직 악하게 되는 길을 찾아 다니면서도 스스로 한울님을 모신 주체이기 때문에 죄가 되지 않는 다고 믿으니 천도교가 어떻게 지상 천국을 건설 하겠는가!

  3)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에서
     '하나님의 날은 되풀이되지 않고 언제나 오늘이고, 하나님의 '오늘'은 영원입니다.'라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은 우리경전의 부질없는 과거나 미래를 들먹여 영원한 오늘을 헛되이하는 것은 나무위에서 고기를 찾는 형국이란 성사님의 법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지난일을 그리워 하는 지금의 천도교가 현제와 미래의 시간만이 존재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되새겨 봐야 한다. 현재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과거와 미래를 변명의 수단으로 악용해서는 안 된다.

   4) 데카르트의『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는 4가지 격률을 제시했다. (1) 가장 온건한 의견에 따르는 것, (2) 일단 결단한 것은 최후까지 견지하는 것, (3) 자신의 역량의 범위 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4) 천직을 정하는 것이다. 지금의 천도교가 거두절미하여 도식하고 있는 오류의『사계명』을 비교하면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의미다. 우리가 이처럼 사계명을 앵무새 처럼 외우기만 하면 죄를 면하는 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줄 모른다. 쉽게 계명이라 이름붙여 주절 대서는 안 된다. 도덕가를 읽고 정직한 실천을 행해야 한다.

  5) 로크의 『정부론』
    '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고, 각자 모두 자연법의 집행권을 포기하여 그것을 공동체에게 양도하는 곳에서만 비로소 정치 사회 또는 시민 사회가 존재하게 된다.' 는 롴의 정부론은 성사님의 명리전을 압축해놓은 말과 같다. 법과 종교가 일치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현실에 도가 있음을 인정하는 천도교의 지향이다. 지상천국을 만들 수 있는 이념을 현실에 둔 것이지 공상의 변명과 회피속에 둔 것이 아니다.

  6)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법이란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물의 성질로부터 발생하는 필연적인 관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존재는 그의 법을 가진다. 신도 그의 법을 가진다. 물질계도 그의 법을 가진다. 인간보다 우수한 지성적 존재도 그의 법을 가진다. 짐승도 그의 법을 가진다. 인간도 그의 법을 가진다. 신은 창조자로서 우주와관계한다.' 천도교의 삼경을 보는 듯 하지 않는가! 날짐승 풀 한포기도 시천주의 관계가 있다는 해월신사의 법설은 이들의 철학과 같은 것이다.

  7) 루소의『에밀』에서
      신은 나에게 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양심을, 선을 알기 위해서는 이성을, 선을 택하기 위해서는 자유를 주시지 않았던가? 룻소는 종교를 인간 본연 감성의 자연스러운 발로라고 본다. 그는 성경도 많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예수는 신이나 신의 아들이 아니라 본 받아야 할 완벽한 인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천도교가 지향하는 성심설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말이다. 대신사님은 진정한 한울님의 도를 펴시어 한민족 이강토에 지상천국을 건설 하도록 보내주신 본 받아야 할 완벽한 인간이신 것이다.

  모든 학설의 주장은 끝없이 펼쳐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공부하면 할 수록 천도교 경전의 울타리를 벗어 날 수 없음을 발견한다. 다만 경전의 진리를 한가지도 제대로 실천을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아집적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속으로 전이해야 할 천도교를 인식 못하는 때문이다. 천도교는 통째로 뒤집어 없애고 새로운 싹부터 시작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패러다임 전환이다. 쿤의 철학관념이 진실로 천도교에  도입될 필요가 있다.